한줄 詩

무서운 안부 - 이철경

마루안 2020. 11. 15. 19:23

 

 

무서운 안부 - 이철경


술 취해 뒷골목 화장실 찾다가
열어젖힌 후미진 주점 소우(少雨)
홀을 지키는 마담은 서너 번 바뀌었지만
젊은 날 손님이 장년의 손님이 되어도
부르던 노래는 여전하다
협소한 주점 안,
대여섯이 다닥다닥 마주 앉아
처음 본 손님들이 노래하다
술잔을 부딪치며 명함을 교환하던 곳
일어서면 부딪힐 것 같은 낮은 천장엔
세계 각국의 지폐가 노랫가락에 춤추던 곳
방음 효과로 토굴같이 허름한 아지트엔
고성도 불편치 않다
청승맞은 노래를 다 같이
따라 부르며 취해 가던 그날들,
불온한 시절에도 하찮은 애인과
간간이 들렀던 소우,
다시 가 보고 싶다던 친구가
세 번째 뇌수술 들어갔다는 소식 후
연락이 끊겼다
주점에 앉아 노래 따라 부르다
세 번째 수술 후 연락이 끊긴
그의 안부가 무섭게 궁금한 밤이다


*시집/ 한정판 인생/ 실천문학사

 

 

 

 

 

 

싱글 대디 - 이철경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나
빗소리 들으며 취해 가던 밤,
거나하게 취한 친구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보슬비 내리는 골목을 홀로 걸었네
시나브로 빗방울 굵어져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오는 비 그치기만 기다렸네
기다려도 오지 않을 그녀는 오간 데 없고
굵어진 빗방울은 폭우로 변했네

우산도 없이 비에 젖은
처지를 생각하니
우울이 비처럼 스며들며 눈가를 젖히네
인적이 드문 밤, 홀로 서러이 어깨를 들썩이다
우산 들고 마중 나온 둘째 딸이
처마 밑에 주저앉은 아비를 보았네
늦은 밤, 처음으로 아비의 들썩이는 어깨를
일으켜 세우며 함께 소리 없이 흐느끼던
늦가을 비 내리는 귀갓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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