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11월 - 박시하

마루안 2020. 11. 11. 22:06

 

 

11월 - 박시하


젖은 낙엽에서 부드러운 냄새가 난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한 채
누군가의 얼굴을 길게 그렸다
보석처럼 빛나는 젖은 낙엽에서
가느라단 비명처럼

정오의 종소리가 울렸다
당신의 등이 지진처럼 흔들리며
무너져 내렸다
이렇게 투명해도 되는 걸까 우리는
이렇게 자꾸만 열리는

푸른 문을 갖고 있어도 되는 걸까

낙엽을 밟으면 젖은 발자국
발자국을 남기며 사라지는 우리에게는
죽은 잎사귀들이 살아간다고 믿어서
그들에게 무게를 지우고
천천히 사라지는 우리에게는

삶이 있을까
그런데도 열리는 문은 무엇일까
저 차갑고 선명한 문은
왜 닫히지 않는 걸까


*시집/ 무언가 주고 받은 느낌입니다/ 문학동네

 

 




가을 - 박시하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서늘한 첫 바람
옆에서 걷는 사람의 온도
달이 둥글어진다는 사실
구름이 그 달을 가끔 안아준다는 것
별들의 생명도 꺼진다
그래서 알게 되었지
결국 쇠락하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라나는 손톱을 깎아내며
시간에게 기도를 한다

사라진 목소리가
나뭇잎이 색을 바꾸는 것처럼
더 아름다워진다
한 번도 내 것인 적 없던
너의 얼굴이
더 아름다워진다

어둠도 빛이다
변하지 않는 합창

달의 멜로디를 듣는다
한 번도 같은 적 없던
너의 눈빛

앞에서 계절이 걸어간다


 


# 누가 11월을 겨울이라 하는가. 무엇이든 막바지에 불타는 것이 좋은 것, 가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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