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득한 독법 - 조하은

마루안 2020. 11. 8. 19:20

 

 

아득한 독법 - 조하은


청보리 수런거리는 오월의 밭을 지날 때나
늦가을 낡은 소매에 영혼이 깃들 것 같은 날
낮과 밤 사이에서 나의 걸음은 보풀이 일었다

똑바로 걷는 법을 잊어버리는 두 다리는
일생이 느렸고 어디든 멀었다

지칭개나 망초 순을 따며
여린 것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깊은 강바닥 어둠 속에도 생의 질문이 흘러가듯이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가에서 겨울나무는
은유를 낳았다

반듯하게 걸어도
여전히 한쪽으로 기우는 걸음의 방식도
통점마저 제 안으로 끌어안아
아침을 일으키는 들풀도
꽃이었다고

서쪽 하늘 붉어지는 저녁마다
짧은 발목에 굵어진 생의 이야기를
은총으로 읽는 아득한 날

다 잃어도 홀로 떠나는 짐승처럼
절룩이며 걷는 나의 삶은
누구보다 올곧은 직립의 걸음이었다


*시집/ 얼마간은 불량하게/ 시와에세이

 

 

 

 

 

 

용서의 바깥 - 조하은


늦가을 공원에 티격태격하는 어린 연인
헝클어진 여자의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햇빛이 돌아서고 있다

익숙한 골목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날
너의 팔목에 매미처럼 붙어 있던 단발머리

주먹을 꽉 쥐었고 골목 밖으로 내달렸다
파도치는 감정을 단속하자
신발이 벗겨진 한쪽 양말 속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미안하다고 말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용서라는 말을 전송하고 싶었지만
내보내지 못한 회색 마음이
자꾸만 팔을 잡아당겼다

용서의 바깥으로 나올 수 없었다
바람이 잠잠해지고
새로운 풀꽃 하나 자라나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시인의 말

비바람이 몰아쳤다

걷다가 힘들면 멈출 수도 있다는 걸
넘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차오르는 문장을 달래가며
바람에 맞선 내 걸음을 내놓는다

살아 있어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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