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상처의 향기 - 정기복

마루안 2020. 11. 11. 22:15

 

 

상처의 향기 - 정기복


새털 같은 제 삶의 무게도
감당하기 힘에 겹다는 듯 스산하게 낙엽 지는 날

고향 집 마당 들어서다 갈바람 쏠려가는 측백나무 울타리 밑
마침 생장을 마친 모과 하나 툭 떨어져 뒹구는 것을
얼결에 흙먼지 털고 주워 든다

어머니 한 눈 상하신 채
살아낸 세월이
노란 모과 닮았다는 생각 불현듯....

무심히 책장에 놓아둔 그놈
은은히 향기 뿜어내는 게 아닌가

다가가 살펴보니
제 살 썩혀 발하는 저 놀라운 살신성인

어머니 상처의 향기 내 몸 가득 짙다.


*시집/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천년의시작

 

 

 



내 가거든 두 아들에게 - 정기복


허깨비를 애비로 둔 죄라면 죄
의상능선 의상, 용출, 용혈, 증취, 나월, 나한, 문수 일곱 봉우리에 뿌려라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 바위와 소나무 밑동에 흩어놓아라

비봉이 이고 선 하늘에
해 뜨기 전
누구도 오르기 전 새벽 여명을 향해 뿌려라

승가봉 지나 문수봉 오르는 암릉길
문득 돌아보면 아득한 세상
그 벼랑에 뿌려라

사기막능선, 이제는 한결 친근한 해골바위에
바람 타고 일어서는 바위 벽,
용오름으로 허공 치닫는 숨은벽에

한 줌 남겨 바위꾼 용모 아저씨께 전해라
다행 친구에게 힘이 남아있어 밧줄 탈 수 있다면
이승에서는 닿을 수 없었던 인수봉

살다 간 흔적 남기지 말고
연필 깎는 칼로라도 이름 석 자 아무 데도 새기지 말고
인수봉 꼭대기 지나는 바람에 흩뿌려 주길....




*시인의 말

어린 시절 자다 깬 한낮 대청마루에, 봉당에, 마당가에, 싸리울에, 초가지붕에 쏟아지던 햇살은 살을 베듯 눈이 부신데 엄마도 누나도 뵈지 않고 낯설고 외롭고 슬퍼지고 막막하여 왈칵 울음을 터뜨렸던 기억.

시를 쓸 때나 시를 읽을 때 가끔은 낯설고 먹먹한 그때의 마음이 찾아온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스무 해 만에 두 번째 시집을 엮는다. 눈이 내려 쌓이면 배낭 메고 북한산 숨은벽 올라 아무도 찾지 못하는 바위 틈새 시집 한 권 숨겨 두고 백운대, 인수봉 지나는 바람에게나 읽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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