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눈물에도 전성기가 있다 - 이운진

마루안 2020. 11. 8. 19:29

 


눈물에도 전성기가 있다 - 이운진


그리워하고 싶은데 그리워지지 않는 날이 오는 것처럼
누구의 생애쯤이든 다시 만나자던 약속을 잊는 것처럼
시든 꽃다발 속에서 나오는 바람처럼

결국, 사랑처럼
눈물도 고비를 넘긴다

내 심장과 가장 가까웠던 말을 잃고
제아무리 눈이 슬퍼도
이제 눈동자는 잠기지 않고

눈 속에는 있으나 마음속에서는 사라진
눈물에게 눈을 찔리고 웃을 때

한때는 익사(溺死)의 깊이로 흐르던 눈물
더 이상 맺히지 않는다

눈물에도 전성기가 있었다


*시집/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천년의시작

 

 

 

 

 


검은 눈물 가득한데 - 이운진


세상은 이 정도의 슬픔으로는 흔들리지 않나 보다

바닷속에서 잠든 아이들
면도날처럼 야위어가는 아기들
폭풍우에 사라진 마을
전쟁터의 낮과 밤

어제도
십 년 전에도 수백 년 전에도 똑같은 슬픔
돌아오고 돌아오는데

이 순간 두 눈에 담을 수 없는 석양이 지고
서울 하늘 별보다 많은 가로등 켜지고
악의 없는 무관심으로 지구는 돌고,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소녀
필생의 악몽을 꾸는 동안

일시에 휘황하게
칸나꽃 피어나서 흔들리면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어내고,

어떤 태양도 고치지 못하는
얼음 같은 마음속

심장을 덮은 녹 두꺼워져
검은 눈물 가득한데

이 정도의 모순으로는 신은 결코 흔들리지 않나 보다


 

 

# 이운진 시인은 경남 거창 출생으로 1995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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