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겸상 - 전영관

마루안 2020. 11. 12. 22:10

 

 

겸상 - 전영관


절름발이 연인의 걸음에 맞춰 걷듯
천천히 꾸준히 오는 저녁

나이든 남자의 눈물처럼
잠깐이지만 세상이 무거워지는 가을비

일기예보가 정확히 맞으면
안심되다가 두려워진다
밀려드는 어둠을 밀치고 방안을 지켜내는
형광등이 힘겨워 보인다
아내가 미소 지을 때마다 이 별 어딘가에서
목화가 푹신하게 피어날 것이다

매달려 버티다가 가을비 핑계 삼아
못 이기는 척
흙으로 돌아오는 이파리의 나날들이다
밥벌이 때문에
가장이라는 버스가 되어 과속했다
갓난쟁이 아들 둘을 태웠는데
청년이 되면 내릴 것이다
습성인지
의자가 비었는데도 한동안 노선을 돌았다

김치부터 된장을 거쳐 토닥이는 도마 소리까지
아내의 저녁 준비 속도에서 살림이 늘던 때를 생각한다
거쳐온 모퉁이들을 돌아본다
영혼에게 안부 건네듯 겸상하며
평생의 허기를 채우듯 서로를 먹인다

이미 다 들어찬 어둠을 슬퍼하진 않는다


*시집/ 슬픔도 태도가 된다/ 문학동네

 

 

 

 

 

 

삼십 년 - 전영관
-1988년 11월 12일


사랑한다면 웃고
고맙다 손잡으면 눈물짓는 사람아

당신 덕분에 오르막을 쉽게 걸었고
당신 때문에 내리막에선 발밑을 살폈다

나는 왜
아내라는 안경을 써야
공부하는 아들들 등짝이 보이고
어머니의 굽은 등이 눈에 밟혔는지

혹한과 굴욕이 거듭되던 나날들에도
나 혼자만 아내라는 목도리를 감고
끄떡없다 우쭐댔다
반성이 후회로 굳어지며 습성이 되었다

나중에, 라는 노동에 숨은 각다분함이란
세탁기의 고단―청소기의 통증―냉장고의 불면―건조대의 다급―유리창의 민망―화분의 후회―우산의 예감 

괜찮아, 라는 배려 뒤에 가려진 느른함은
미소의 파스 냄새―장바구니의 결림―라디오의 낮잠―TV의 고독―현관의 불안―귀가 전화의 안도―퇴직의 빈곤―갱년기의 격려

우리 퇴적된 우환의 지층이 깊고
하, 많은 시댁 형제 1남4녀의 곰비임비가 다채로웠다
삼십 년 거듭해도 서툰 채굴사일 뿐
삼십번째 결혼기념일에 혼인서약을 짚어보니
거짓말만 늘린 불량 남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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