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의 아름다운 벽 속에서 - 이소연

마루안 2020. 11. 7. 22:23

 

 

나의 아름다운 벽 속에서 - 이소연


여기 나의 아름다운 벽이 있어
그대 속눈썹이 빛나는 그곳에 악기점이 있는 것처럼
불면을 들쳐 업은 소음은 즐거운 노래
쓰레기 매립지를 떠도는 중금속의 먼지로 배를 채울래
나는 벽과 벽이 만든 모서리
딱딱하게 자라나 내게 노래가 되어주는 그대는
나로부터 가장 가까운 벽의 기척들

그러니까 오늘은 지평선 저편으로 차들이 두런두런 교차하는 사거리를 밀고, 오래 묵은 담배 냄새가 피어나는 벤치를 밀고, 괄호로 치장한 장미들의 이상한 향기를 밀고, 별의 이빨들이 숨어살고 있는 쥐들의 구멍을 밀고 밀어서

나는 내 속의 나침반을 잃어버렸지
환청에 시달리는 차도는 몸이 지쳐 녹아내렸지만
어둠을 그냥그냥 모자이크 처리하는 꿈을 꾸네
나의 아름다운 벽 속에서 그대
날개를 꿈꾸는 화석이 되었네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걷는사람

 

 

 

 



사춘기 - 이소연


아버지의 일과는 술 취한 동사자를 치우며 시작되었다
나와 친구들은 삽이랑 양동이를 들고 나가
지붕 밑에 눈사람을 퍼 담았다
멈출 마음이 없었다

죽은 정원에서 고드름이 자라났다
겨울은 짐승을 죽여 만든 목도리처럼 풍성해졌다
서로를 찔러도 피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치우며 하루를 시작했다

생일선물로 받은 물소가죽가방을 열어 보았다
지퍼를 잠글 때마다 손목이 잘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방 안엔 털장갑이 있었지만
따뜻해서 꺼낼 수 없었다

손등이 붉어졌다
얼얼한 달덩이만이 나와 함께 겨울을 났다

신발 사이즈와 속옷 사이즈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규모도 없이 나는 늙어가기 시작했다

 

 

 

 

# 이소연 시인은 1983년 경북 포항 출생으로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14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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