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옛 편지 - 허림

마루안 2020. 11. 3. 21:26

 

 

옛 편지 - 허림


옛 애인의 편지를 읽는 저녁이다
아니 별처럼 뜬 안부를 묻고 싶은 것이다
오래도록 마음에 둔 시간이 참 길다
주홍의 꽃들이 피고 지는 동안
애인도 나도 늙었다
향기도 빠지고 빛깔도 낡아
누추한 햇살을 깔고 앉아
깊은 주름을 말린다
가을처럼 그대가 벗어놓은 삶이 무엇이든
한때 들려주던 매미라 한들
나는 아직도 그리워하는 중이다
사랑하지 않아도 될 것을 사랑하여
고독해지는 저녁
옛 애인의 편지를 읽으며
물처럼 깊어지는 시간의 무늬들
서로 사랑하지 않아서
더 그리웁다고 절절했던 어둠을 읽는다


*시집/ 누구도 모르는 저쪽/ 달아실출판사

 

 

 



이맘때 - 허림


살다보니
약속 지키지 못한 날들 많았구나
은가락지 하나 손가락에 끼워주지 못한 첫사랑도
사랑해 사랑 귓속에 꾸겨 넣던 날도

안개가 눈부신 아침
붉고, 노란 꽃잎 같은

나 아니면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던

안개 사라지듯
유서도 쪽지도 문자도 카톡도 없이
잊을 수 없다면
그냥 눈감고 살겠다고,

자작나무 같은 검은 눈을 품은 여자

사랑하지 않고도
함께 살던
그맘때

 

 

 


# 허림 시인은 1960년 강원도 홍천 출생으로 강릉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와 1992년 <심상> 신인상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신갈나무 푸른 그림자가 지나간다>, <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 <울퉁불퉁한 말>, <이끼, 푸른 문장을 읽다>, <말 주머니>, <거기, 내면>, <엄마 냄새>, <누구도 모르는 저쪽>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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