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눈독 - 우남정

마루안 2020. 11. 6. 21:50

 

 

눈독 - 우남정


오래된 습관이 북쪽으로 기울었다

올해도, 그가 건네준 모과 한 알 창가에 안치한다
갓 면도를 끝낸 듯 턱선을 타고 그의 향기가 번진다
연둣빛 윤기가 도는, 잘 익은 노랑은 왜
터무니없이 짧을까

연하디연한 분홍 꽃의 열매가
과즙도 없고, 근육질인 것도 아이러니지만
욕창이 나지 않도록 이리저리 체위를 바꾸어 주어도
어디에 부딪힌 것처럼
멍이 번지고
반점이 하루하루 깊어지는 건 더욱 알 수 없는 일이다

저 어둠의 뿌리는 어디에 닿아 있을까
노랑을 먹어치우고 서서히 꽃을 피우는 저 농담(濃淡)은

슬픔이란 저런 것인지도 모른다

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미라가 되어가는 모과를 바라보는 일

서리 내리기 전, 서둘러 석탄 한 덩이 품는 일


*시집/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문학의전당

 

 

 

 

 

 

어머니의 스웨터 - 우남정


어머니는 낡은 스웨터를 푼다 어머니의 가슴과 등판, 소매를 차례로 뜯어낸다 매듭을 찾는다 올올이 얽힌 고리가 힘겹게 떨어진다 팔꿈치의 헤진 실을 끊어내고 두 끝을 하나로 잇는다 오글오글 긴 겨울을 견딘 옹벽이 가느다란 온기를 흩날리며 풀려나온다

스웨터를 입은 계집아이가 흑백 사진 속에 있다

나란히 뻗은 두 팔에 오글오글 실들이 감긴다 점점 좁아지고 밑으로 처지는 팔, 아파요, 아가야 따뜻한 스웨터 짜줄게 조금만 참아라, 아이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애써 무거운 팔을 들어 올린다

어머니는 털실 타래에 김을 쏘이신다 펄펄 끓는 주전자의 김을 쐬면 어머니의 주름이 조금씩 펴졌다 어머니는 마침내 둥글게 감긴 털실 몇 뭉치가 되었다

가난한 어머니의 등이 어둠 속에 오랫동안 굽어 있다 나는 어머니의 손끝을 따라가다 까무륵 잠이 들고 자고 나면 가슴이 자라나고 팔이 한 뼘씩 길어져 있었다

목과 소매 끝부분만 새 실로 짠
어머니의 스웨터가
어린 손목을 꼭 붙잡고 있다

 

 

 

 

# 우남정 시인은 충남 서천 출생으로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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