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가 반 가고 네가 반 오면 - 김인자

마루안 2020. 10. 28. 21:47

 

 

내가 반 가고 네가 반 오면 - 김인자


내 할머니가 가고 내가 왔듯이
내 어머니가 가고 내 아이가 왔듯이
내가 갔을 때 내 손자가 오는 일처럼
한 사람이 가고 한 사람이 온다는 말
내가 반 가고 네가 반 온다는 말
따듯해서 좋다
여름이 반 가고 겨울이 반 온 자리
구절초 언덕으로 소풍 나온 이 가을도
첫 밤처럼 다정하니 좋다 참 좋다

더러 생각지도 못한 곳에
급류가 기다릴지라도
강물은 그렇게 흘러갈 때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시집/ 당신이라는 갸륵/ 리토피아

 

 

 

 

 

 

가을이 짧아야 하는 이유 - 김인자


농로를 따라 산 중턱으로 향한다
어깨에 내려앉은 햇살은 따사롭다
비탈밭에선 배추를 수확하는 농부와
늦감자를 캐는 사람들이 새참 중이다
이 산골까지 검은 피부의 이방인이 보인다
묻지도 않았는데 고향이 방글라데시 다카란다
가난하지만 행복지수가 높다는 그곳
흰 치아만큼 맑게 웃으며 오늘 날씨 굿이라고
하기야 어디서 그들이 자신의 일당보다 비싼
우리의 명품 가을을 이토록 맘껏 누려보겠는가
우리는 눈빛으로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위로했다
산 자에겐 시절과 상관없이 태양은 절실한 그 무엇
눅눅한 마음 말려보겠다고 한나절을 밭둑에서 보냈다
가을이 짧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오늘처럼 찬란한 날이 계속되면
저 비탈밭의 농부들은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것이고
일 없는 한량들은 우울해서 금세 미쳐버릴 테니까
해바라기와 별과 사이프러스를 좋아했던
고호나 할 법한 독백을
감자 캐는 농부들 앞에서 할 줄이야
나를 훔쳐본 구절초가 실없다는 듯 웃는다
저 꽃도 날아가고 싶은 하늘이 있을 거야
태양이 사라지고 그늘이 쌓이면 그들이나 나나
돌아가야 할 길도 그만큼 깊어지겠지

 

 

 

# 김인자 시인은 강원도 삼척 출생으로 1989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겨울 판화>, <나는 열고 싶다>, <상어떼와 놀던 어린 시절>, <슬픈 농담>, <당신이라는 갸륵>이 있다. 여행지의 흔적을 담은 다수의 산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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