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돌이킬 수 없는 - 윤의섭

마루안 2020. 10. 27. 19:37

 

 

돌이킬 수 없는 - 윤의섭 


예문이지

아주 평범한 성장기를 거쳤다는 것부터 단칸방을 전전했다는 것 
영화를 좋아하고 여행을 즐기고 한때 성냥갑과 레코드를 수집했다는 정도
지독히 가난했고 잠깐 풍요로웠고 웃으며 슬펐고 슬퍼하며 슬펐고 보이지 않아 미칠 뻔했고 미칠 것 같아 찾아 헤맸고 오늘은 끝장을 내고 말겠다 오늘은 못 하겠다 다짐하다 미루다 여기에 이른 빈약한 연혁

위는 누군가의 인생을 축약해 놓은 글이다 잘못된 부분을 찾아 올바로 고치시오
예시일 뿐이지 별로 어렵지 않은

자막처럼 단풍 진다
자막처럼 달이 뜬다

꽤 오랫동안 낯선 풍경의 길 위에 서 있다는 생각 무수한 언덕을 넘어왔으나 그것은 누군가의 무덤일 수도 있다는 생각 마지막 언덕은 내 무덤이길
가녀린 들꽃과 마주쳤지만 인사를 나눈 것도 같아 너였니 동족이었니 우리

예문을 모두 고치면 행복했다는 문장이 나올지도 모르지 신의 답안에는 이 길이 신의 답안에 이르는 길이라고 쓰여 있을지도 모르지 다만 나는 갈대보다 휘청이는 갈대 후회하는 자는 쉽게 끝내지 않는다는 후기를 허공에 써놓고는 꼿꼿하게 말라붙어 온 몸이 갑골이 되어 버린

예시지


*시집/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민음사

 

 

 

 

 

 

전열(戰列) - 윤의섭 


얼마나 견딜 것인가
가을나무 역시 전열을 가다듬는다 격정적으로 암울해진다
무너지면 그리웠다는 듯이 파국을 주겠지
기억의 후방으로부터도 외면당했다는 생각
제 이야기가 끝난 지점에 묻힌 관처럼
모든 말단에는 적막이 있다
그러모을 수 있는 것은 낯선 기대뿐
머지않아 누선이 뚫렸다는 소식이 전해질 테고
두려워 전율이 일 테고
그때마다 낙엽 지듯 철새의 아치가 흩어지듯 태양계의 행렬이 끊어지듯
최후에는 모래의 점성일 수밖에 없는 난망
물러서지 않았으며 뒤돌아서지 않았다고 적힌 일지만이 붉게 물든다
죽음을 내놓으면 상냥한 죽음을 먹여 주겠지
쏟아지다 멈춘 폭포가 여기 있다
펼치다 꺾인 날개가 여기 있다
다가올 날의 시간이 모조리 모여들어 영원 너머에 이른 듯 순식간에 늙어버린다
몇몇은 비장했지만 사실은 이번 세상에서는 비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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