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녹내장 - 김보일

마루안 2020. 10. 21. 19:52

 

 

녹내장 - 김보일

 

 

공덕동 서울안과에서 안구단층촬영을 했다

쌍계사 잎자루에서 천왕봉 꼭대기까지 뻗어나간 지리산 잎맥처럼

망막에서 뇌로 가는 시신경이 필름 속에 뻗어 있었다

 

내 몸은 얼마나 많은 길들을 거느리고 있는지

스무 살의 처녀가 女子라는 이름으로

내 심장으로 온 것도 그 길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한 女子의 나라에서 한 사내의 심장까지를 잇는 길가에서

검둥개가 짖고 복사꽃이 흔들리고

달빛은 천축의 불빛처럼 들썩였을 것이다

 

시신경이 차츰 사라지는 것이 녹내장이라며

의사는 안압을 낮추는 약을 내게 처방해 주었다

 

나는 필름 속에 사라져 가는 모래의 길들을 보며

그 길로 흘러들어 왔을 산초나무, 층층나무, 노간주나무 꽃나무들의 이름과

그 길로 흘러들어 왔을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왼쪽 뺨에 있던 굵은 점이 떠오르고

영국 여왕이 그려진 우표가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이불의 꽃무늬, 재봉틀의 두꺼비 문양, 줄무늬 내복, 초록색 이태리 타올...

 

모든 것은 내게 살러 왔을 뿐 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집/ 살구나무 빵집/ 문학과행동

 

 

 

 

 

 

시월 - 김보일

 

 

술 먹고 그의 집에 가서 잔 날 아침

그의 구두를 신고 귀가했다

 

며칠 후

그에게서 엽서가 왔다

 

형, 몸이 바뀌었어

 

그 일 있고

3년쯤 뒤였을까

그는 자기는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라고 고백했다

 

그는 바뀐 몸을 신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걸어왔을까

 

몸이 삐져나온 구두를 물끄러미 보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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