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한정판 인생 - 이철경 시집

마루안 2020. 10. 17. 21:48

 

 

 

설레는 마음으로 시집을 읽었다. 이철경 시인은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지만 <한정판 인생>은 세 번째 시집이다. 한 시인의 정체성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 번째 시집은 읽어야 제대로 알 수 있다고 믿는다. 비로소 이 시인을 가슴에 담는다.

 

한정판 인생이라는 너무나 인간적인 제목에 끌리기도 했지만 시집 내용이 아주 좋았다. 다독보다 정독, 정독보다 꼼독(깨알처럼 꼼꼼하게 읽는)을 우선하는 내 시집 읽기다. 누군가는 다양한 시를 읽어야지 시 보는 눈이 좁아진다고 충고할지 모른다.

 

그 충고 달게 받는다. 그러나 내 눈은 이미 좁다. 더 넓히고 싶은 생각이 없다. 어디 가서 지식 자랑할 일도 없고 낯선 시를 힘들게 읽느니 차라리 시를 끊겠다. 시가 나를 위해 찾아 오길 기대하지 않는다. 틈틈히 내가 좋은 시를 찾아 나설 뿐이다.

 

그렇게 이 시집을 만났다. 목차만 보고도 나와 딱 맞는 시집일 거라는 촉이 왔다. 덮어 놓고 선택하게 만드는 끌림이다. 아직까지 왕성한 식탐도 대책이 없지만 돋보기 없으면 아무것도 읽지 못하면서 활자만 보면 환장하는 책탐도 대책이 없다.

 

돋보기의 도움을 받지만 시인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읽을 수 있는 눈은 건강하다. 눈 건강할 때 더 많은 책을 읽을 걸 하는 후회는 부질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게으르기는 마찬가지다. 누구나 인생을 낭비한다. 다만 적당히 자기 인생을 미화할 뿐이다.

 

시인은 다섯 살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고아원에 맡겨졌다. 그곳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자랐다. 평범한 인생은 아니다. 며칠 사이로 유복자를 간신히 면한 내 인생은 다행스럽다 해야 할까. 시인은 어릴 때부터 삐딱하게 나갈 인생 조건을 잘 갖췄다.

 

낳아 준 사람은 있는데 돌봐 줄 사람이 없는 경우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러나 무사히 자라 대학도 나오고 착한(?) 시인이 되었다. 부모 복 없는 인생 마누라 복까지 없다더니 결혼 후 얼마 못가 아내가 떠나고 어린 두 딸을 맡아 기저귀 갈아 가며 기른다. 

 

개처럼 맞으며 성장했던 고아원 생활과 졸지에 싱글 대디가 된 신산했던 시인의 삶이 이 시집에 온전히 담겼다. 공무원 시험 정답 외우듯 문학 이론으로 무장한 모범적인 싯구는 없다. 그런 시는 가늘고 긴 손가락을 가진 시인들에게 어울린다.

 

이 사람도 시에 감염되어 시인이 되었고 나는 시가 좋아 시인의 시를 내 것으로 만든다. 온전히 내 마음을 관통하는 시로 인해 스펀지 물 빨아들이듯 시인의 시가 천천히 내 몸 속에 물든다. 이런 시집을 읽을 때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