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면접의 진화 - 김희준

마루안 2020. 10. 19. 21:36

 

 

면접의 진화 - 김희준


시각장애인에게 파란색을 설명해보세요

퇴화된 아가미의 흔적 귓가에 난 작은 구멍은 무슨 용도일까 궁금했다 물속에서 숨쉬는 방법을 찾아낸 게 갈릴레이였나 다윈이었나 낡은 금서의 한 페이지를 찢는 지난 꿈에 죽은 해안가를 걸었다

선천성 이루공은 태아 시절 귓바퀴와 안면 일부가 떨어지면서 생긴 기형 아니었나요?

네, 아닙니다 인류의 조상이 물고기라는 증거라고 모래사장에 널려 있던 건 해파리의 피부 조직이었다 표정을 읽을 수 있어서 뒤집지 않기로 했다

저는 왼쪽에 있습니다

손을 폈다 물갈퀴를 잡았다 신체 구조가 무악어류와 닮았다 셔츠 안에 지느러미를 숨기고 사는 거 다 알아 해부 구조를 들킬까봐 옷을 입는 거잖아 모계에서 이어지는 유전자를 어떻게 설명할 건가요 물비린내 풍기는 손목의 혈관은요?

이게 파란색이라고요

귀에서 터지는 비릿한 액체를 손으로 문질렀다 교인(鮫人)은 귓바퀴가 선명해진다 파도의 능선을 자르면 왜곡된 문양으로 밀물이 깃든다 물의 언어를 체득한다

아가미를 누른다 진액이 나온다 더 깊이 손가락을 넣었다 냄새 좀 맡아보세요 이게 파랑이라니까요 신발을 벗었다 귀옆 구멍이 뻐끔거렀다

어중간한 종말로 금서를 작성하던 한나절 전생과 진화가 충돌하는 중이었다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싱싱한 죽음 - 김희준


편의점에는 가공된 죽음이 진열돼 있다

그러므로 꼬리뼈가 간지럽다면 인체신비전 같은 상품을 사야 한다 자유를 감금당한 참치든 통으로 박제된 과육이든

인스턴트를 먹고 유통기한이 가까운 상상을 한다 여자를 빌려와 글을 쓰고 사상을 팔아 내일을 외상한다 통조림에는 뇌 없는 참치가 헤엄쳤으나

자유는 뼈가 없다

냉장고를 여니 각기 다른 배경이 담겨 있다 골목과 심해 다른 말로 배수구 그리고 과수원 세번째 칸에는 누군가가 쓰다 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다 빌어먹을 허물

싱싱하게 죽어 있는 편의점에는 이름만 바꿔 찍어내는 상품이 가지런하고

형편없는 문장을 구매했다 영수증에는 문단의 역사가 얼마의 값으로 찍혀 있다




# 김희준 시인은 1994년 경남 통영 출생으로 경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을 다녔다. 2017년 <시인동네>를 통해 등단했다. 2020년 7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은 그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