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문득 사라지는 것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 박병란

마루안 2020. 10. 18. 19:55

 

 

문득 사라지는 것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 박병란

 

 

종일 비추어도 애쓰지 않는 것이 귀를 파다 발톱을 깎다 흰머리도 쏙쏙 뽑아주다가 문득, 총채로 먼지를 털면 총채마저 빛이 되어 누구나 드나들어 그만 또 다른 누구나가 되어

 

너를 벗어난 건 보이저1호가 유일한 물체지 아마, 달마시안 얼룩무늬처럼 지구도 창백한 몽고반점인지 물어봐줄래 최근 근황을 가장 잘 안다고 하니

 

햇살마켓 같은 그곳에는 다이소처럼 없는 게 없어서 탐사가 시작되면 멀미가 날 거야 하행곡선을 그리다 삶이라는 벙커에 처박히고 볼품없는 가정사는 때때로 병이 들고 우리가 한꺼번에 삼인칭이 되어 밖으로 튕겨 나갈 때

우주를 떠돌다 외계생명체를 만나면

안녕하세요 인사말은 보이저1호가 장착해갔다고 들었어

머지않아 우리는 어쩜 말을 잃게 될지도 몰라

 

티끌같이 저물어가는 지구도 한때는 팽창한 행성의 일부분, 나는 우연히 전해진 소식이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라지는 것들이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해를 좇지만 갠지스강 모래알 수만큼 갠지스강이 있다고 상상하니 애쓰며 산다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가 사라지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싶었다


*시집/ 우리는 안으면 왜 울 것 같습니까/ 북인


 




이웃 - 박병란


도심에 출현한
힌뺨검둥오리 떼에게

길을 내주느라 소리죽여 기다리는 자동차
이고 가던 감자를
선로에 쏟은 할머니를 위해 멈춰선 기차

넘어진 곳에서 자리를 살피는 게

법보다 정의롭다는 생각이 드는 기사를 읽다가

나는 어느 세상에 살고 있나 불끄럼해진다

모른 체하기엔 잠깐 스치는 이웃들 새빨간 거짓들

거기 아직 물속이 찰 텐데

돌고 돌아 내 앞에 놓인 감자, 배고픈 이 없을까

내가 버린 만큼 누군가 굶고 있다

내가 가진 만큼 빼앗긴 누군가가 있다

평화를 핑계 삼아 전쟁은 멈추지 않는데

전쟁 얘기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기사가 실렸다

내가 아는 진정한 이웃은

헌책방을 하며 고아를 돕는 서교동 천작가다
그랬을 때 누군가는 엉터리다


 


# 박병란 시인은 경북 포항 출생으로 2011년 시전문 계간지 <발견>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내는 안의 해,라는 기별이라지요>, <우리는 안으면 왜 울 것 같습니까>가 있다. 2019년 경기문화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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