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벤치의 자세 - 정병근

마루안 2020. 10. 18. 19:43

 

 

벤치의 자세 - 정병근


앉아서 자는 것은 조는 것이다
잠깐 졸아서 미안한 자세로
누기 지적하면 언제든지 일어날 태세로
잠 아닌 잠을 깜박 조는 척
다리를 쭉 뻗는 것은 벤치에게 미안한 일이다
신발을 벗는 것은 상습적이다
눕는다면 뭔가 위반하는 일이지 않겠는가
누가 봐도 잠깐 쉬는 태도로
얼마든지 깰 준비로
비스듬히 벤치와 하나가 되는 것
잠과 휴식의 경계가 모호한 그 지점
벤치는 그런 것이지
소파도 아니고 마루나 침대도 아니니까
가령, 이발과 면도의 범위라든가
애정과 추행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에 벤치가 있다는 것
상념이 많아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살짝 들키는 그런 정도여야지
드러누워 잔다면 걸어 다니는 사람에게는 미안한 일
앉는 것과 눕는 것은 천지 차이
드러눕다 드러내다 드르렁거리다 같은 말은 얼마나 불경한가
벗은 발은 또 어쩌고
눕지 못한 몸이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있다


*시집/ 눈과 도끼/ 천년의시작

 

 

 

 

 

 

그의 책상 - 정병근


그가 없는 그의 책상이
있다 그는 먼 나라로 휴가를 떠났거나
산으로 출근했는지도 모른다
올 것이 온 듯 물끄러미 그는 없고
그가 없을 때,
책상은 오랜 숙원처럼 고독하다
뒤통수에 깍지를 낀
의자는 텅- 텅- 멀고
반들반들 똥내 박힌 대(竹)방석이
그가 없는 무게를 발설하고 있다
그가 없을 때,
책상 위의 컴퓨터는 더욱 캄캄하고
눈을 타는 짐승처럼 책상은
굶어 죽을 궁리로 골똘하다
그가 없자마자 까맣게 잊히는 그의 책상
비우면 비워지고 치우면 치워지는
그가 없는 그의 책상이
있다 사람의 궁리를 떠받치던
한 쓸쓸한 유물이 있다
한 번도 나의 것이 아닌
그가 없는 그의 책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