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홍역(紅疫) - 이은규

마루안 2020. 10. 19. 21:50

 

 

홍역(紅疫) - 이은규


누군가 두고 간 가을
홍역처럼 붉다, 라는 문장을 썼다 지운다

무엇이든 늦된 아이
병(病)에는 누구보다 눈이 밝아
눈이 붉어지도록 밝아
왜 병은 저곳이 아닌 이곳에 도착했을까
답이 없는 질문과 질문이 없는 답을 떠올린다
안으로부터 차오르는 열매

나는 병력을 지우고
붉은 몸을 잘 표백시키는 사람들을
조금 부러워했나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조금 부러워했나
기다리지 않아도 돌아오는 절기
혼자 부르는 돌림노래에 공을 들이고
그것만은, 포기하지 않기 위해 손을 모을 뿐

저기 핑그르르 수면을 도는 단풍잎
같은 병을 다르게 앓지 못한 우리들은
왜 약속 없이 나누는 역병처럼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해서만 생각했을까

붉어지는 열매 금세 핑 도는 울음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아닌
그래서 나는 오늘
질문이 없는 답에 쉽게 고개를 끄덕여버린
오랜 부끄러움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
잘못된 문장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멀리서 가까이서 도착할 소식들에 귀를 열고
이제 질문이 없는 답을 내내 의심할 것

홍역처럼 붉다, 라는 문장을 지웠다 쓴다
누군가 두고 간 가을


*시집/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문학동네

 

 

 

 

 

 

간헐적 그리움 - 이은규


가을의 다짐에 귀기울여보세요

하루 한 끼니와 같이
하루 한 번 당신을 그리워하기로 한다
간헐적으로
나뭇잎들 떨어지다, 떨어질까
지난 기억과 이번 가을 사이

마땅할 당, 몸 신
마땅히 내 몸과 같은 당신이라 부르지 않기로 한다
그럼에도 이미 아직
당신이 당신이라면
사이사이로 지는 잎새 쌓이거든
열두 겹 포근히 즈려밟고 오세요*

도착 대신 연착되는 안부일 때
이번 가을과 다음 기억 사이
그럼에도 아직 이미
하루 한 끼니에 익숙해진다면
나뭇잎 사이 숨겨놓은 다짐을 들추지 않기로 한다

몸속 세포가 바뀌듯이
간헐적으로
나뭇잎들 떨어지다, 돋아날까
계절이 오고가는 사이
열두 겹 기억의 도착을 예감해보기로 한다
그럼에도 이미 아직
한줄기 햇빛 시침이 우리를 향하는 시간

다짐에 귀기울여보세요 가을의


*김남주의 시 <지는 잎새 쌓이거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