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울음의 탄생 - 박서영

마루안 2020. 10. 19. 21:58

 


울음의 탄생 - 박서영


나의 눈동자는 색을 바꿀 줄 안다 
앵두나무가 보이는 여관집 방문을 열고 앉아 
일렁이는 가로등빛 그늘을 본다 
하늘이 울음을 얼려 눈을 내리는 밤이다 
족발에 소주 한 병 앞에 놓고 
슬픔을 애도하는 밤이다 
앵두 한 알 매달지 않았는데도 
저 나무는 무겁고 힘들어 
눈 쌓인 앵두나무 발목이 젖어 축축해 
나는 무릎을 세우고 쭈그려 앉았는데 
몸에 울긋불긋 지렁이가 피었다 
밖이 어둡지도 않는데 밤이라고 하지 말아요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생각이 깊어 슬픔이 탯줄처럼 길어지는 사이 
순천의 한 여관방에서 
분홍색 목젖에 울음이 매달려 흔들린다 
한 호흡만 더 건너가자, 생이여 
추운 앵두나무를 몸 안에 밀어 넣고 있는 
환한 가로등처럼

눈이 녹아내려 드러난 앵두나무 뿌리가 
족발처럼 자꾸 보여, 
물어뜯고 싶어지게, 
쭈그리고 앉아 
발가락 열 개를 꾸욱꾸욱 눌러 본다


*시집/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 걷는사람

 

 

 

 

 

미안해요 - 박서영


길 위에서의 일이다
슬픔은 작고 예뼜고 회색 털을 갖고 있었다
한쪽 얼굴에 번지는 햇살 자국
피를 머금은 짐승을 어떻게 할까 궁리를 했다
겨울에서 봄으로 옮겨줘야 하나
고민에 빠진 나를 해방시켜주는 듯
슬픔은 찬란한 제 가슴을 보여 주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에게 몰려온 나비 떼
흰 나비와 검은 나비들이 슬픔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부분을 핥아먹기 시작했다, 혼이 혼에게
깃들어 뭔가를 초월해버리는 풍경들
내게는 주검을 수습할 기회가 있었다
세월의 마맛자국을 지우며
미안해요, 라는 말은 날아가고
나는 남았고 당신은 떠나는 것
어제란 그런 것

 

 

 

 

# 박서영 시인은 1968년 경남 고성 출생으로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2006년 천년의시작>, <좋은 구름, 2014년 실천문학사> 두 권의 시집을 냈다. 2014년 제3회 고양행주문학상을 수상했다. 2018년 2월에 세상을 떠났다.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는 그의 유고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