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서러운 개화 - 김윤배

마루안 2020. 10. 17. 21:30

 

 

서러운 개화 - 김윤배


쑥부쟁이 꽃봉오리가 이슬을 턴다 
혹독한 가뭄을 건너온 불굴이다 
꽃대 밀어올리는 쑥부쟁이가 눈물겨워 
무릎 꺾어 꽃망울 보았다 빈약한 꽃대로 
푸른 하늘 조심스럽게 흔드는 쑥부쟁이 
감싸안고 볼을 부볐다 

기다려 꽃 필 날이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초조함으로, 오지 않는 꽃 필 날을 기다린다 하더라도 
무기수의 발소리를 꽃잎마다 숨기느라 
늦어지는 
쑥부쟁이 
그 서러운 개화를 기다려야 하는 

막막하고 막막한 


*시집/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휴먼앤북스

 

 

 

 

 

 

구절의 눈빛 - 김윤배


*


구절초는 매일 떠났다

망월동이나 팽목의 해안에서 보라색 꽃잎을 펼쳐 푸른 멍을 가리고 있을 것이다 시월 깊어지면 구절초는 더 멀리 떠나고 싶어 입술을 물 것이다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 구절초, 보랏빛 꽃잎의 정절을 역성이라고 말할 수 없겠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지 못해 먼 하늘 그리는 군락의 노란 꽃판이 구절의 눈빛은 아닐까

깊이 묻어 두었던 사초는 읽을 수 없게 퇴락했다
난독의 사초 속에서도 천기는 붉게 솟아올랐으면 했다
그것으로 한 시대의 용서를 말할 수 있겠다 싶었다
밀서를 열어 시대를 잘못 끌고 간 죄를 묻는 것이
구절초를 돌아오게 하는 일이겠다 싶다

구절초를 무리 지어 꽃 피우게 했으니
매일 떠난다고 어찌 뜨거운 가슴 아닐까


*


떠나고 돌아옴이 구절초만의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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