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기억의 투구 - 이철경

마루안 2020. 10. 16. 21:18

 

 

기억의 투구 - 이철경


추억을 곱씹는 나이를 인정할 수 없지만
해 지고 비 오면 오래전 기억에 빠져드네
혼란하고 힘들던 시절,
그때는 세월이 흐르면 행복할 거라 생각했네
어쭙잖은 희망을 품고 현실을 잊고자 했지
세월은 흘러, 너무나 많이 흘러
까마득한 옛 기억은 상처만이 남고
화장한 재를 뿌리듯 망각의 강에 뿌렸네
비가 내리는 창가에 앉아
오지 않을 행복을 기다리며 상처의 기억을 더듬거릴 때
창틀로 젖은 날개 털며 벌레가 다가왔지
내리치는 빗줄기에 찢긴 날개로
기어오를 기력도 없이 쓰러지듯 앉더니,
"지금 많이 행복하냐고"
.....아무 말 할 수 없었네
발버둥 치며 벌레처럼 살지 않으려 했지만
날갯짓하면 이내 세찬 바람 불어와
꺾어 버리고야 말았네
삶은 반전의 연속이듯 주위를 맴돌며
현실의 비참이 나락으로 끌어내렸네
비에 젖은 벌레의 몰골로 주변을 살펴보니
이제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딱딱하게 경직된 외피만이 덩그러니 앉아 있네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는 빈 껍질의 존재,
그 존재의 서러움이 진물처럼 흐르는 웅크린
딱정벌레 한 마리


*시집/ 한정판 인생/ 실천문학사

 

 

 

 

 

 

누 떼 - 이철경


고독이 불편한 자의 눈은
무리 지어 다니는 누 떼와
비슷한 눈빛을 가지고 태어나지

읍내 이발소에 걸려 있는
사파리 풍경과 일치하는
유년의 기억
세월이 가도 기억은
말라비틀어진 나무 송진처럼
송곳니에 목이 물려 흐르던 진물

북한강 나룻배, 그 겨울 언덕,
주머니 속 구슬
반짝이던 나무에서 떨어지던 은빛 비늘

삶을 결코 아름답지 않은
다시 오지 않을 머나먼 초베강 유역
아, 그 절체절명 상처의 나날들



 

# 이철경 시인은 1966년 전북 순창에서 출생하여 화천에서 성장했다. 서울과학기술대 전자공학과와 고려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1년 계간 <발견> 신인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 등단했고 목포문학상 평론 본상과 2012년 <포엠포엠> 평론상을 수상하며 평론가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단 한 명뿐인 세상의 모든 그녀>, <죽은 사회의 시인들>, <한정판 인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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