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을이 쏟아진다 - 조하은

마루안 2020. 10. 16. 21:25

 

 

가을이 쏟아진다 - 조하은


멀리서 보아야 잘 보이는 풍경
그 속으로 들어가
나도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저마다의 생각에 잠긴 숲에서 빠져나와
오래된 나무 아래를 걷는다

새 떼가 철교를 가로 질러 날아가고
금강 물빛의 떨림을 따라
내 가슴속에도 작은 파장이 인다

걸음을 멈추고
공산성 성벽에 귀를 대니
구절초의 낮은 소리가 들려온다

시든 꽃잎에 남아 있는 향기는 더 깊고 진하다

가느다란 꽃잎을 촘촘하게 펼치고
햇살 여무는 시간을 기다리다
어느새 서늘한 저녁이 되어버린

구절초 앞에서
쉬이 일어서지 못하는 무릎 위로
달빛이 내려앉는다

온 생애를 건 몸부림에
와르르, 가을이 쏟아진다


*시집/ 얼마간은 불량하게/ 시와에세이

 

 

 

 

 

 

나의 고향은 갈림길에 있었다 - 조하은


철 이른 들꽃들이 순서 없이 피어나
무더기로 모여 있거나
모란이나 작약이 스스로 향기에 취해
몽롱해지는 작은 골목
뜨겁지는 않지만 따뜻하던 동네는
갈림길 사이에 있었다

청양 대천, 유구 예산 가는 삼거리
시내버스 시외버스 수없이 오갔지만
새로이 터를 잡는 이 아무도 없었다

마을 앞 고령산에 진달래 피고 지고
산 아래 유구천 말없이 금강으로 흘러갔다

청양 대천 가는 이 그 길로 가고
유구 예산 가는 이 그 길로 갔다

마을 안쪽 공동 우물에 뚜껑이 덮이고
불내를 풍기던 뜨끈한 구들장은
아침마다 울던 딱따구리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사람들은 짐을 싸기 바빴다
가다가 쓱 한번 뒤돌아보고는,
휘돌아나가는 바람처럼 먼 곳으로 흩어져갔다

감나무는 자꾸만 꼭지를 아래로 툭, 떨어뜨렸고
한쪽만 남은 대문은 어스름 속을 삐걱거렸다

그렇게나 역시 갈림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 조하은 시인은 충남 공주 출생으로 2015년 <시에티카>로 등단했다. <얼마간은 불량하게>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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