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백운대행, 진관사 - 정기복

마루안 2020. 10. 15. 19:05

 

 

백운대행, 진관사 - 정기복


한 점 가을 붉다
저 불쏘시개 하나가 열흘 이내 온 산 불사를 것이다

진관사 계곡으로 비봉 오르다
척후병으로 와 불붙은 한 점 단풍 본다

앞길에 놓은 능선의 숱한 잎들
점점이 붉게 물들이던 산사람의 걸음을 흉내 내듯
깊은 골을 걷는다

분홍으로든 주황으로든
누구의 손가락 마디 하나, 옷자락 한 뼘 적셔보지 못하였으나

언젠가는 내 심장은
격발의 순간으로 가쁘게 물든 적이 있었다

젖어 든 추억과 받아들인 기억
왼발 오른발 번갈아 디디면 어느덧 비봉과 향로봉의 갈림길이다
가을빛 처연한 오늘
이왕이면 가파르고 험한 바람길 택한다

무심한 내 발길은
젖은 잎 한 장 말리지 못하나

한사코 벼랑에 매달리던
그대의 심사는 한 잎 붉게 피워 온 산 불사른다.


*시집/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천년의시작

 

 

 

 

 

백운대행, 문수봉 - 정기복


삼각산 문수봉은 천원(天元)이며 방이다

문수봉 올라 사방을 보노라면
바둑판의 천원인 양, 윷판의 방인 양 큰 산 북한산 한가운데 가부좌 틀었다

동쪽으로는 산성주능선을 따라 대남문, 대성문, 보국문, 대동문이 줄지어 있고
남쪽에서는 비봉능선이 향로봉, 비봉, 사모바위, 승가봉을 몰아 비마처럼 달려오고
서쪽에서는 의상능선이 의상봉,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 나월봉, 나한봉을 일으켜 등뼈로 뻗대어 온다

사통팔달 꼭짓점에서
산에 난 모든 길의 유리걸식과 봉우리들의 오체투지를 지켜본 뒤
곁에 선 보현봉과 나란히 합장하며
인수봉 국망봉을 거느리고 북두에 앉은 백운대를 알현한다

어느 능선을 타고, 어느 봉우리를 넘어왔을지라도
문수봉 올라 보면 방에 든 듯 적멸이고 천원에 착수한 듯 보궁이다

어느 보살의 품 안이 이러할까?


 

 

# 며칠 전 가을이 점점 익어가는 북한산을 올랐다. 진관사에서 시작해 비봉과 승가봉을 거쳐 문수봉에 오른다. 대남문 지나 보국문에 이르면 잠시 고민을 한다. 백운대를 가느냐 아니면 하산을 하느냐다. 이날은 백운대를 외면하고 중흥사를 거쳐 하산을 했다. 산책과 등산을 겸해 북한산을 오를 때마다 가까운 곳에 이런 명산이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산 타기 좋은 가을이다. 시 읽기도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