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가을빛 - 김상렬
구렁이 담 넘어오듯 가을이 온다.
죽어 나자빠져도 못내 지워지지 않을
징하고 징한 그대 그리움 끌며.
잔생에 무슨 업장 타고났기에
우리 인연은 이다지도 질긴 것이냐.
시집가자마자 객혈 쏟으며 쓰러진
사촌누님의 가슴속 같은 저 가을빛.
여름 한철, 뱀 잡아 날뛰다가 뱀한테
물려 죽은 어느 땅꾼의 해진 양말들이
감전의 전기 빨랫줄에 내걸려 있다.
부신 가을 날빛 속에 거꾸로 매달려
바람 든 백골로 흐느끼며 나부낀다.
하늘은 한 사랑으로 미친 듯 짙푸르고
붉은 잎들의 시샘은 불난 듯 환장이더니
낮잠 한숨 자고 나니 또 어느새
건너편 산자락은 딴 세상의 이내 빛이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가을이 간다.
*시집/ 푸른 왕관/ 새숲
이명(耳鳴) - 김상렬
그리움이 깊으면 귀도 점점 멀어지는가.
먼바다 소라껍데기 같은 내 달팽이관 속으로
온갖 소리의 정령들이 스며들어 와 춤춘다.
푸른 숲을 뒤흔드는 매미 떼이기도 하고,
빈 하늘 가로지르는 몇만 볼트 고압선이거나
깊은 밤 짝 찾는 황소개구리 울음이거나
냉장고로 쉼 없이 흘러드는 전류 한 끄트머리를
싸락싸락 갉아먹는 불가사리이기도 한 소리가
진종일 주인 허락도 없이 발맘발맘 방정스럽다.
귓속은 찐빵처럼 부풀어 오르고 소리는 갈라진다.
세기말 어디쯤의 경계에서 몸부림치는 혼돈이다.
이명에는 약이 없어요. 마음을 다스리세요.
뭇 원한도 내다 버리고 과거도 돌아보지 말아요.
경험 많은 의사 선생님은 오지랖 넓게 처방했지만
마음의 병 다스리는 일이 어찌 마음대로던가.
무시로 덤벼드는 내 귓속마을 벌레들은
마음이 고요할수록 더 그악스레 아우성치고,
종종걸음으로 장난스레 걸어오던 지진은 마침내
바다를 집어삼킨다, 오, 천지개벽이다
그리고 정적, 아무런 소리도 들여오지 않는다.
# 김상렬 작가는 197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지난 45년 동안 참된 세상과 인간성 회복을 위한 소설가로 살아왔다. <푸른 왕관>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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