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수미산 엘레지 - 이정훈

마루안 2020. 10. 7. 21:58

 

 

수미산 엘레지 - 이정훈


좌골신경통 도진 엄마가
비스듬한 개수대를 붙들고

--손이 내 딸보다 낫다

애고 어머이, 아무려면
'손'과 '딸'보단 나은 것들 생각으로
어물어물 내빼려다

시집간 딸보다
내 말 들어주고 아들 호박죽도 끓여 먹이는
이 북두갈고리가 신통하지 않으냐

귀를 잡혀 밥상으로 붙들려 오네

속을 다 퍼내 쭈그렁 껍질만 남은 손이
주걱도 삽도 되어본 적 없는 손
방바닥에 깔게 하시네

남의 눈물 수미산 아래 혼자나 질금거려
가짜 슬픔 가짜 사랑에 밑천 빠지는
이 습성까지 짐작하셨는가

더 먹어둬라, 한국자 비워내면
두국자로 채워주시는 손바닥 앞에서
십리 장터 싸돌다 온 수캐
넙죽 죽사발이나 핥다 오는 밤

손아귀처럼 따신
호박죽 봉다리를 꼭 쥐어주며
어여 가라고 또 가라고
오래전에 추석이나 쇠고 가듯
손 흔드는 밤


*시집/ 쏘가리, 호랑이/ 창비

 

 




대전으로 간다 - 이정훈


산에 가면 나무에게 지은 죄
강에 가면 물고기에게 지은 죄
왜 당신들에게 지은 죄는 보이질 않는가
기소와 선고와 집행이 유예된 세월에 마디가 돋는다
다음엔 또 무엇이 찾아올까
죄가 더덕더덕한 상습범의 얼굴로
청주 고등법원 524호 중법정을 내려와 대전으로 간다
여름을 기다리는 길가 산들아,
올해는 다를 거라 큰소리치지 말자
아무렇게나 어깨를 부풀리지도 말자
미루고 미루어도 가을이 오고
굽은 가지와 흰 눈썹 그땐
내 죄목을 다른 줄기로 변론하리
--그는 아무것도 음모하지 않았고
물살에 잠긴 억새가 잠시 지느러미처럼 흔들렸을 뿐

남은 죄가 밤하늘 별처럼 총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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