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구름의 변명 - 박태건

마루안 2020. 10. 6. 22:05

 

 

구름의 변명 - 박태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 하는 것은 떠나보내는 것
바람에게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
집 없는 새의 영혼처럼

여름날 쿵쿵 다가오는 우레의 발소리에
서툰, 빗방울로 사라지는 것

세상의 초록들에게 더 이상
마음 주지 않을 것 그리하여
흘러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것

가령 하느님이 기다란 손톱 끝으로
쓱, 그어놓은 신작로라든가

앞만 보고 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는 것

하늘의 문장을 몰래 써 놓았다가
비행운처럼 지워버리는 것

한때 내 안에 있던 
불꽃을 생각하지 않는 것

한 조각 떠도는 구름의 숙소가
내 유일한 거처일지라도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


*시집/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 모악

 

 

 

 

 

 

구부러진, 힘 - 박태건


손바닥을 펼치자
총각 "인생이 참 기구하구먼!"
육교가 있던 자리
새점을 치는 노인은 등이 굽었다
굽은 못을 펴기 위해 제 손가락을 찍은 사내
얼마나 무모한가 구부러진, 힘을 꺼내려
서툰 망치질을 한 적 있다
중심을 향해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튀어나가는
찰라의 불꽃 혹은 섬멸

상처를 받으면 울음으로 돌려주던 시절
발가락이 무릎을 구부리는 힘으로
육교를 건넌다
길 위의 길을 세운다

나는 지금까지 반듯하게 자란
나뭇가지를 본 적이 없다


 

 

# 박태건 시인은 1971년 전북 익산 출생으로 199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와 <시와반시> 신인상에 당선되었다. 원광대 국문과에서 <신석정 문학의 탈식민성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안문화연구소에서 지역문화연구를 해왔다.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가 등단 25년 만에 나온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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