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너무 시끄러운 적막 - 고재종

마루안 2020. 10. 6. 21:57

 

 

너무 시끄러운 적막 - 고재종

 


박새가 확독에 고인 물을 찍고 날아가며
휘익, 살같이 흘러가는 날을 그어 대는가


뒤란 대울타리 댓잎은 스적이며
외로운 것들은 서로 비비며 운다는 것일까


고양이가 폴짝 뛰어올라 고추잠자리를 놓치며
이곳이 꿈의 마당은 아니라고 하건 말건


나는 이덕무의 간서치 흉내를 좀 내보는데


이 집에 살았으나 바람이 된 귀신들이
일전부터 몰려와 세간살이와 자꾸 수작질한다


그 소리에 화들짝 깨어나는 건 맨드라미,
붉은빛에 사무쳐서 대문 쪽을 돌아보는데


무슨 유령이라도 되는지 슬그머니 들어서는
어제 딴 강냉이를 쪄서 가져온 정오(正午),


토방의 개는 무슨 할 말이 저리 많은가


반나절도 시끄러운데, 지친 진초록의 적막은
왜 유모차 미는 노인의 꼽등이에 켜켜이 쌓일까

 

 

*시집/ 고요를 시청하다/ 문학들

 

 

 

 

 

 

길은 내가 홀로 흐르는 꿈 - 고재종

 

 

나뭇잎이 일렁이고 떨어졌지만
울지 못한 세월로 무저갱을 밟아 왔다


휘파람새의 휘파람을 좇아가면
눈앞 가득 떠오르던 빨주노초파남보
애면글면 다가가는 꽃밭보다는
일껏 은산철벽 숲에 갇히곤 하는 길


자줏빛이라고나 할까
흔하디흔한 장미 한 송이도 없이
지상의 그 무엇과도 바꾸지 못한
고단과 남루의 쓰라린 빛이라면


그 빛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고
길은 언제나 나를 불러내선
내가 홀로 있는 부처를 보여 주었다


닿지 못한 사랑을 그리워하거나
여벌의 쓸쓸함을 헤아릴 묵주도 없이
머무를 수 없는 운명을 지닌
강물에 목을 적시는 건
나는 나를 흐르는 길이기 때문,


후회도 광채도 없는 발길로
불구의 오늘은 적막의 꿈을 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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