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재앙의 환대 - 백무산

마루안 2020. 10. 7. 22:08

 

 

재앙의 환대 - 백무산


팔을 다쳐 깁스를 하고 오니 너나없이 반긴다
염려가 아니고 환대다
식당 여자는 껴안을 듯이 두 팔을 내밀고
데면데면하던 이웃도 나를 보더니 얼굴을 편다
좌회전하던 먼 이웃도 우회전하며 손을 내민다

혁대 풀고 거웃까지 보여 가며 봐봐 나도 석달 고생했다고
한여름에 얼마나 개고생이냐고 운전은 되냐고
팔 아니라 대가리였으면 좆 됐을 거 아니냐고 말은 그렇지만
정작 재앙의 기억들을 떠올렸을 것
재앙이 가져다준 새잎 기억들을

탈 없기를 원하지만 말짱한 것은 뻔뻔한 콘크리트
망가진 뒤에야 간신히 새잎이 연다는 걸

지난날의 우리가 부서지지 않았더라면
별들이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이라는 거울 앞에 내가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가까운 죽음 나의 죽음이 기다리지 않는다면
미래가 말짱할 곳은 사막뿐 재앙이 준비돼 있지 않다면
우린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을 것

행복은 수백갈래지만 재앙은 한곳을 향해 있어
우리 모두 한곳 재앙을 바라보면서 얻는 구원은
서로 손을 뻗어야 한다는 것
아름다움을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경험하지 못한 대홍수의 기억이
사소한 일에도 우리 모두를 뒤흔들어놓기도 한다는 것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창비

 

 

 

 

 

 

누구였을까 - 백무산


아마존 밀림에서 한 사람이 발견되었다 이십여년 홀로 살아남은 사람 벌목꾼에게 부족들 몰살당한 뒤로 초막 한채 가죽옷에 사냥 도구 몇개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했을까 오직 생존만을 위해서 존재할 수 있을까 기다릴 사람조차 하나 없다면 영원히 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기억에서 말이 다 사라진 뒤에도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는 자신을 야생과 어떻게 구분했을까 그는 자유로웠을까 자연은 그를 포근하게 감싸주었을까 잔인한 포식자였을까

천만이 사는 도시에서 누구는 수십년 만에 또 어떤 모녀는 이십년 만에 발견되기도 했다 회색의 밀림에서 실종된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웃들은 야생의 포식자였을까

초막 같은 지하 단칸방에서 밤이면 문밖에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 들어야 했을까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했을까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의 드므 - 성선경  (0) 2020.10.09
가위 - 류성훈  (0) 2020.10.08
수미산 엘레지 - 이정훈  (0) 2020.10.07
구름의 변명 - 박태건  (0) 2020.10.06
너무 시끄러운 적막 - 고재종  (0) 2020.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