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위 - 류성훈

마루안 2020. 10. 8. 21:59

 

 

가위 - 류성훈


태어났지만 생이 없던 첫 누나였을까
생은 있지만 태어나지 못하는 나였을까

저승이 모두를 잘 먹일 순 없겠지만
얼핏 보이고 들릴 때가 있어, 미래의 신이
키가 큰 건 죽음이 삶보다 더 길어서겠지

얼굴이 없는 사람을 보았다
세상엔 공포나 고독처럼 평등한 것들도 많아
죽은 시간에 찾아와 나를 넘어 다니던 그는
저보다 나이 먹은 나를 보면서
첫울음 앞에선 세상에 온 걸 환영하면서
돌아갔을 때는 편히 쉴 것을 안도하면서
이제 산 자들에게만 기도하는 나를 본다

우리는 천국에 대해 뭐라고 해야 할까
면목이 없는 세계를 대신해 나는
아직도 말로만 마중하는 것일 테다

안녕, 아직는 잘 지낼


*시집/ 보이저 1호에게/ 파란출판


 




상 - 류성훈 


돌본다는 건 심장에 깊어지는 못이었다 사월이 개화 순서를 놓치면 식기들이 바닥에 떨어지고, 먼 촌수로부터 가까운 촌수에게로 찾아오는 문상에게 엄마는 다음 밥상을 차린다

꽃무덤 하나를 두고 서로가 서로를 미루던 병동은 그 긴 추위를 어떻게 견뎌 왔을까

기저귀 속에서 한 번도 만개해 본 적 없던
외할머니가 더는 일어날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살아서도 일어설 수 없는 봄과
삶을 돌본 적 없으면 끝도 돌보지 않는 진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박이 떨어질수록 혼자 남겨질 식사와 혼자 남겨질 가족사는 끝내야만 옳은 것이 되어 갔다

요양,이란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는 뜻
지긋지긋한 오한보다 더 지긋지긋한 것이 봄이라고, 밥상머리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만개한 벚꽃이 거리에 쏟아지듯, 쏟긴 물컵은 밥상의 비린내만 걸레질한다 돌볼 일 없는 꽃놀이로 어질러진 침상들이 더 두꺼운 혼자가 되어 간다

입맛이 없어져도
살 사람도 죽을 사람도
모두 자기가 흩날릴 거라곤 말하지 않았다

 

 

 

*시인의 말

달리 뗄 입도 없이
약불처럼 거기 있었기를

호명할수록 지워져 가는
나의 마지막 이승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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