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김 씨의 당부 - 서영택

마루안 2020. 10. 5. 19:19

 

 

김 씨의 당부 - 서영택


혼불은 제 몸을 태워서 불꽃을 피는구나
장작을 넣자 불꽃 화르락 일어서다 앉는다
김 씨는 북망산 가려고
저 나무를 베지는 않았을 것
북어처럼 서걱서걱 소리를 내고는 했다
김 씨는 이빨 보이고 웃는다

"내 인생 마지막 환하게 살다 가네"

마주 앉은 백구가 꼬리를 흔든다
이름 없이 생을 전전하더니
죽어서도 그냥 김 씨였던 그
영정사진이 걸어와 툭툭 손을 털었다
양은 사발에 막걸리를 따른다

"회포들 풀어, 댕기러 오느라 고맙네
나는 북망산이 세 걸음, 자네들은 열 걸음
산 입에 거미줄 치지 말고
신발이나 잘 챙겨 가게나"


*시집/ 돌 속의 울음/ 서정시학






구룡마을 - 서영택


꿈에서 깬 나무들이 감추고 있던 말들을 쏟아낸다

냉장고는 휘파람을 불고 프랫카드가 바닥을 뒹굴고 있다 골목은 이미 늙어버렸고 벽에는 시간의 주름이 술술 풀리고 있다 첫사랑 가요가 흘러나오는 테이프처럼 철거된 집터에는 능소화가 마지막 명줄을 붙잡고

보잘것없는 풀들이 바닥에 누워 있다

빈 공터는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다 주인 없는 냄새와 개 한 마리가 대모산의 굽은 능선을 바라본다 어떻게 흘러왔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기다림에 지쳐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한다 한 때의 시절도 서서히 시들어가고 잡고 있던 밧줄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




# 서영택 시인은 경남 마산 출생으로 2011년 <시산맥>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현동 381번지>, <돌 속의 울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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