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구절초 - 김재룡

마루안 2020. 9. 29. 19:36

 

 

구절초 - 김재룡

 

 

어머니는 여섯 살이 된 나를 데리고 개가했다. 양주 남면에서 광적면으로 이십여 리를 들어가는 삿갓봉 외딴 집이었다. 칠 남매의 둘째가 새아버지였다. 여덟 살과 네 살 위 고모 둘, 두 살 위 삼촌, 한 살 밑 고모를 포함해 모두 열 식구가 한 지붕 밑에 살았다. 이따금 밖으로 떠도는 삼촌이 집에 들르곤 했다. 갖가지 들꽃이 흐드러져 있을 때 여동생을 보았다. 이름이 국화였다. 할아버지는 목수였고 아버지는 정미소 일꾼이었다.

 

밖으로 떠돌다 어쩌다 집에 들어서는 할아버지는 성미가 고약하고 불같았다. 장마철이면 사랑방에서 문틀을 짜면서 지에미부틀이라는 욕을 입에 달았다. 가끔 작은삼촌이 두들겨 맞았다. 없는 살림에 어머니는 할머니를 설득해 두부 장사를 시작했다. 하루걸러 콩을 불려 맷돌에 갈고 콩물을 밀가루 보자기에 짜 두부를 쑤었다. 가래비 갖바위 법원리 신산리 장에 이고 가서 팔았다. 중풍을 맞은 할아버지 욕은 여전했으나 더 이상 매를 들 수는 없었다.

 

국화는 예쁘게 자라 네 살이 되었다. 흑단 같은 긴머리에 별명이 또록이였다. 그해 봄 할아버지 상여가 나갔다. 가을 들꽃이 흐드러지기 시작할 때 할머니는 두 가마들이 커다란 독에 동치미를 담갔고 두 가마니의 메주콩을 쑤었다. 이듬해 정월 그믐 고추장을 담그려고 길금 우려낸 물에 찹쌀을 갈아 풀에 쑤어 커다란 함지박에 퍼 날랐다. 장독대와 김장간이 있는 뒷마당이었다. 삼촌과 고모와 국화와 나는 그 달착지근한 풀떼기를 손으로 찍어 먹으며 놀았다. 누구의 발에 걸렸는지 국화가 그만 뜨거운 고추장 풀 함지박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한쪽 팔과 다리, 배와 목 부분에 큰 화상을 입었다. 병원에 데리고 갈 염을 낼 수 없는 시절이었다. 신작로 건너 오십칠 연대 의무관이 와서 들여다보았지만 화기가 든 국화는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어머니 모르게 아버지는 국화를 앞산 어디엔가 묻었다. 국화가 묻힌 곳을 아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을 것이다. 그해 가을 우리 식구들은 고개 넘어 건넛마을에 집을 짓고 분가했다. 해마다 삿갓봉 가는 길엔 들국화가 지천이었다. 그런 줄만 알았다 들국화인 줄만 알았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어느 날 어머니와 삿갓봉에 다녀오는 길에 어릴 적 국화 이야길 한다.

 

"어무니, 그때 국화가 내 발에 걸려 함지박에 빠진 걸 알고 있우?"

"그걸 누가 알겠나. 이 사람아"

"오빠 땜에 그랬어. 오빠 땜에 그랬어! 라는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한 거 같아서...."

"그럼, 삼촌이나 고모 땜에 그랬다고 하면 자네 맘이 편했겠나. 그리고 저건 벌개미취에여. 저 흰 꽃이 구절초고. 국화 묻은 데 저 구절초가 저절로 잔뜩 피어 있더라구."

 

 

*시집/ 개망초 연대기/ 달아실

 

 

 

 

 

 

개망초에게 - 김재룡

 

 

고맙다 정말 다행이다

보아주고 불러주지 않아도

덜 서러울 거 같은 이름이어서

단 한 번의 눈길만으로도

기다리다 질 수 있는 꽃잎일 거 같아서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찔끔거려도

괜찮을 거 같아서

 

 

 

 

# 김재룡 시인은 1957년 경기 양주 출생으로 강원대 사범대학 체육교육과를 졸업했다. 1985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면목고등학교를 시작으로 시흥고, 구로고, 개포고에서 근무했다. 1989년 전교조 결성부터 현재까지 조합원으로 있다. 2004년 강원도로 전보해서 속초상고, 강원체고, 춘천여고, 평원중, 화천정보산업고에서 근무했다. 2019년 8월 화천고등학교에서 정년을 맞았다. <개망초 연대기>가 생애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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