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맨드라미를 위한 사화(詞話) - 황원교

마루안 2020. 9. 29. 19:28

 

 

맨드라미를 위한 사화(詞話) - 황원교

 

 

꽃도 제 가슴에 생채기를 낼 수 있다

번갯불처럼 눈을 멀게 하는 꽃

천둥처럼 귓전을 울리는 꽃

눈 마주칠 적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텅 빈 늦가을 뜨락을 지키는 저 외로운 파수꾼이

머리에 이고 지고 있는 붉디붉은 생각들도

차가운 밤이슬에 색이 바래 간다

 

뜬눈으로 밤을 함께 보내고

아침이면

배갯잇에 머리칼 한 움큼씩 묻어나는 생이여

남은 날은 저 앞산 단풍처럼 물들어

갈 때는 선운사 동백꽃처럼

한 치의 미련 없이 낙하할 수 있게 해다오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몸통으로

보도블록 틈새에서 꼿꼿이 버티고 서 있는

눈물겨운 저 고집,

내 아버지의 생을 빼닮은 꽃이여

 

 

*시집/ 꿈꾸는 중심/ 도서출판 시가

 

 

 

 

 

 

화덕 앞에서 - 황원교

 

 

살아가면서

방화범처럼 세상을 죄다 불 싸지르고 싶은 날이 왜 없을까

 

혼잣말로 소신공양(燒身供養)이라도 하고 싶다던

병상의 아버지가

화덕 속의 마지막 불씨처럼 사그라지고 있다

 

머릿속에는 망각의 지우개만 남아

가물가물 말라가는 기억의 물줄기를 따라

낯익은 풍경과 그리운 이름들을 차례차례 지우고 있다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 윤이 나던 연장들은

어느덧 녹슨 고철 덩어리로 변해버렸고,

화덕과 무쇠솥은 시꺼먼 그을음 더께를 쓰고 앉아

지난봄 마지막으로 사골국물을 보얗게 우려내던

당신의 손길을 무장무장 그리워하고 있다

 

간밤의 외로움과 허전함을 달래려는 듯이

조석으로 화덕 앞에 쪼그려 앉아 군불을 지피시던 당신.

굳이 죄라면 식솔들을 뜨겁게 껴안고 산 것뿐

결코, 자신을 데우거나 끓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가장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가끔 누군가 불쏘시개처럼 쑤셔 넣는 설움과 분노를 홀로 삭이며

그것조차 운명이라 생각하며 고독하게 타올랐다

 

세상 뜨실 준비를 다 마치신 걸 눈치라도 챈 듯

벌겋게 녹이 슬어버린 화덕도 가랑비를 맞으며

시름시름 남은 불꽃들을 꺼트리고 있다

 

이제 달랑 베옷 한 벌 입고 가서 활활 타오를

당신의 옷자락을 누가 그토록 잡아당기는가

무엇이 당신을 여태 놓아주지 않는가

삶은 추억 속에 살다 망각 속에서 저무는 것,

 

슬픈 종말을 예고하듯 어스름이 내리는

9월의 저녁,

아버지는 생을 다한 연어처럼

속절없이 죽음의 물살에 떼밀려 내려가고 있다

 

지난봄 당신께서 담벼락 밑에 심어놓았던

붉은 봉숭아 꽃잎마저 맥없이

툭툭 떨어지고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람을 품은 사내 - 정덕재  (0) 2020.09.29
구절초 - 김재룡  (0) 2020.09.29
흔들리는 일 - 이서화  (0) 2020.09.28
단풍이 오는 속도 - 황형철  (0) 2020.09.28
고등어 - 박미경  (0) 2020.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