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리멸렬 - 우남정

마루안 2020. 9. 27. 19:16

 

 

지리멸렬 - 우남정


화마가 고시원 쪽방에 잠든 노인을 삼켰다
술 취한 자동차가 버스 기다리던 청년을 들이받았다
노인이 치매인 91세 아내의 목을 졸랐다
한 여자는 전 남편의 칼날에 온몸을 찔린 채 주차장에 숨져 있었다

해일이 강타한 바닷가에 겁에 질린 여자가 울고 있었다
몇 놈이 악어에게 먹히는 동안
누 떼들이 핏빛 강을 건너고 있었다
먹방 프로에서는 한 세프가 아귀찜 비법을 떠들고 있었다
홈쇼핑에는 대박을 부추기는 경품 추첨이 한창이었다
꾹.. 꾹.. 꾹.. 채널이 돌아가고 있었다

저녁이 저물고 있다

다행이다
목숨 걸고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아서


*시집/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문학의전당

 

 

 

 

 

굴헝 - 우남정 


저녁이었다 
덤불 속 별똥별이 떨어진 자리였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어머니의 기저귀를 간다 
멈칫 미세한 경련 같은 것이 스쳐갔다 
욕창 난 둔덕이 무너져 있었다 
음모 몇 가닥이 수풀 우거졌던 자리에 엉켜 있었다 
폐정처럼, 깜깜한 구렁이 간신히 밀어낸 
검푸른 돌덩이 

화산재 뒤덮인 기름지고 아름다운 땅이었을 
핏덩이가 솟아오르던 간헐천이었을 
끓어오르던 숨길이었을 
그 화산에서 아직 유황냄새가 난다 

어머니의 기저귀를 간다 
바싹 마른 가랑이 사이로 여진처럼 
무한(無限)이 태어나고 있었다 
어린 계집아이의 사타구니를 닦아내던 어머니처럼 
나는 어머니의 깊고 깊은 어둠을 닦아낸다 

식어버린 분화구에서 
검멀레 해변에서 화산석을 줍는다 

몸부림치며 굳은 돌 속에는 신비한 굴헝*이 있다 


*구렁의 제주도 방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