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램프의 사내 - 정병근

마루안 2020. 9. 20. 19:16

 

 

램프의 사내 - 정병근


밥과 설거지를 하기로 했다
대의를 좇아 30년을 떠돈 끝이었다
서쪽에서 해가 뜨고 염소가 나무에 오를 일이었다
아내는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퇴근 때마다 가지런한 그릇들을 보고 뜨악해했다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내가 설거지한 흔적을 탐색했다
나는 검열을 앞둔 군대처럼
싱크대 구석구석까지 말끔하게 닦아놓았다
밥솥을 씻고 밥도 지어놓았다
아내는 지휘관의 표정으로 의기양양해했지만
한두 달이 지나자 조금 어두워지면서
컵이나 음식 쓰레기 같은 걸로 꼬투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당신은 이제 평생 설거지 안 해도 돼, 이런 말끝에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아내도 눈이 빨개졌다
나를 추궁할 일이 설거지밖에 없는 아내여.
말을 뺏기고 정치라곤 나밖에 모르는 사람아,
얼떨결에 노역의 한구석을 잃은 아내는
대견해하면서도 쉽사리 허전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면서 어떤 생각이 몰려와서
조금 운 것도 아내가 알 필요는 없었다
사람들아, 우리 남편은 설거지를 해준다네
램프의 사내를 가졌지 뭐야, 설거지를 부탁해!
함께 알라딘 영화를 보고 온 날도
아내는 설거지거리가 쌓인 주방을 눈으로 넌지시 가리켰다
밥은 밥솥이 해놓았으므로,
반찬을 만들어 아내의 끼니를 온전히 봉양하는 것은
조금 더 생각을 닦은 후의 일일 것이다


*시집/ 눈과 도끼/ 천년의시작

 

 

 

 

 

 

구월의 구전(口傳) - 정병근


빌꿈치를 뚫고 물이 쏟아졌다
누군가 의자 위에 쓸모없는 남포등을 올려놓았다
불을 잃은 남포등은 풀을 피웠다
빈 의자는 무릎을 방치했다

햇빛을 감으며 사내가 커피를 볶았다
오래된 표정이 주름을 펼쳤다
몇 년 만이야 그렇고 말고
모든 하루의 영역으로
고양이는 담과 지붕을 주름잡았다
벽화 속 날개는 남루(襤褸)에 들었다

화분은 지지 않는 꽃을 피웠다
그것은 봄꽃의 모습이었다
흉터를 품은 가죽점퍼가 쇼윈도에 걸렸다
춥기 전에 시골로 갈 거야 그렇고 말고
사내는 커피를 볶고
우리는 찡그리며 구름을 모았다

마른 그늘에서 우물 냄새가 났다
얼굴을 버리고 새로워야 해 그렇고 말고
박힌 물이 발꿈치를 찔렀다
하늘을 말할 때마다
혀에서 맨드라미가 튀어나왔다

우리는 확률을 다하여 웃었고
고삐 풀린 집합처럼 흩어졌다
다음에 봐 다음에 언제 그렇고 말고
목구멍으로 들어간 햇빛이 출렁였다
눈이 부셨고 입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