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 삶을 누군가 대신 꺼내 쓰고 있다 - 이병률

마루안 2020. 9. 19. 22:16

 

 

내 삶을 누군가 대신 꺼내 쓰고 있다 - 이병률


내 삶을 누군가 대신 살아주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몇 초만큼도 안 되는 내 하루는 아무 쓸모가 없거나
사나흘에 한 번쯤은 비겁하기도 하니까

우연히 잡힌 라디오 전파와
그 전파를 다시는 잡지 못하는 날들
누구는 그 전파를 나 대신 사용하겠지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애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질문 혹은 대답
누구는 그 질문과 대답으로 며칠을 살겠지

인생을 나 스스로 살아가는 사막과
누가 대신 살아주는 남극
그 둘의 배합으로 버무려진다
인류가 울음과 기후의 사용을 멈추지 않았듯이

한사코 불속으로 들어가
불속에서 뭔가를 꺼내들고 걸어나오는 사람은
내 삶을 대신 살아주느라 불을 덮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토록 살고 있는 것은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아주고 있는 것 같아서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렇게 갸륵한 세상의 연료들을
어둠 속에서 빼내 또렷이 바라보며 가득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내 삶을 누군가 대신 살아주는 것 같을 때
세계의 절반은 나의 것일 리가 없다고
세계의 모두가 나의 것인지도 모르겠다고도
가만히 나는 생각한다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문학동네

 

 

 

 

 

 

얼굴 - 이병률


하루 한 번 삶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신 얼굴 때문입니다

당신 얼굴에는 당신의 아버지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갑니다
어머니도 유전적으로 앉아 있지만 얼굴을 자세히 보면
누구나 그렇듯 얼굴만으로는 고아입니다

당신이 본 풍경과 당신이 지나온 일들이 얼굴 위에서 아래로 차곡차곡 빛납니다
눈 밑으로 유년의 빗금들이 차분하게 지나가고
빗금을 타고 표정은 파도처럼 매번 다르게 흐릅니다

얼굴은 거북한 역할은 할 수 없습니다
안간힘 정도는 괜찮지만 계산된 얼굴은 안 됩니다
바다의 얼굴을 보여주세요

당신 얼굴에 나의 얼굴을 닿게 한 적 있습니다
무표정한 포기도 있는데다 누군가와 축축하게 헤어진 얼굴이어서 그럴 수 있었습니다

당신 앞에서 이유 없이 웃는 사이
나는 당신 얼굴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얼굴에 얼굴을 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루 한 번 당신과 겹쳐지는 삶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이병률 시인은 1967년 충북 제천 출생으로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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