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양지사우나 - 김정수

마루안 2020. 9. 18. 22:12

 

 

양지사우나 - 김정수


사막을 통째 뒤집어 사막으로 들어갔다
수직으로 흘러내리는 건 시간이나 둥근 나무의 건망이 아닌 모래의
지루한 순응 함부로 벗어날 수 없는 방에서
투명한 방으로 끊임없이 이사를 다녀야만 하는 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세월을 쌓고 또 쌓는 일 툭하면
그만 끝내자 화르락 문 열고 나간 당신이 하루 이후 돌아와
벽을 향해 비스듬히 눕던 일 밤새 뒤척이다 일어난 아침은
좁은 길로 탈출하고 더 깊어지기 전에 뱃속에 소문 들어서기 전에
서로의 출입문 달리하곤 끝내 발목의 속도 늦추는 일
반복된 바람은 다시 되돌릴 수 없고 오랜 습관에
모질게 모래언덕 넘어가는 일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 동거는
고비 같고 출입문에 찍힌 지문처럼 우연한 조우
당신은 한낮의 햇빛 구름처럼 벗어난 것인지 수건으로
낯선 눈빛 가린 채 되돌아보고 낙타 꼬리에 엮인 바닥은
당신이 스민 곳에서 조금 벗어나 흥건하고
동쪽 오아시스를 만나던 날처럼 황망하고 지하의 천장은 높고
높아도 내가 한증막에서 사막여우를 생각하는 것과는
무관한 일 터번처럼 수건 뒤집어쓴 채 과거를 유영하는 것과도
상관없는 일 한증막에서 벗어나 빙하의 의자에 누운 한 호흡
습식과 건식의 등짝에서 툭 튀어나온 날선 발톱에
냉온탕을 오가다 오래오래 당신이 서있던 자리에서 서성거렸다
팔뚝에 박힌 하트의 화살 바라보던, 간혹 들려오던 독백을
저녁의 나뭇가지에 걸어두었던, 오늘을 오늘에 밀쳐 두었던 잠의 끝
사막은 또 적막하게 흘러내리고


*시집/ 홀연, 선잠/ 천년의시작

 

 

 



물의 서쪽 - 김정수


종점이었을 때도
종점을 벗어났을 때에도

역(驛)이 생기기 그 이전
수서 밖으로 나가 본 적 없는 꽃들 혹은 촉수 낮은 벌레
소리들, 강의 배후에 수심을 흘리고 물의 뺨에
쓸쓸한 파문을 키우고

한데 기숙하는 것들처럼 물에 기댄 삶이란 더러는 더 깊은 계절로 흘러가
어두운 뒤통수가 되고 잠깐씩 흐려졌다 밝아져
한 계절 늦은 철새를 마중하고

종점식당, 그 비릿하고도 낡은 간판의 자리
거기서 마감되고 다시 시작되는 석양은
겨우 살아남은 몰락을 더듬고
마지막 가족 식사를 하고

부서지고 파헤쳐진 묘지 같은 삶
아스팔트, 그 아래 묻혀 버린 씨앗의 막막함으로
햇빛은 잠시 빈 의자에 봄을 내려놓고

언젠가 더 종점이었을 때
종점에서 감옥을 훔쳤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