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먼 곳이 있는 사람 - 손택수

마루안 2020. 9. 12. 19:45

 

 

먼 곳이 있는 사람 - 손택수

 

 

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

잃어버린 먼 곳을 다시 찾아낸 사람

걷는 것도 끊는 거니까

차를 끊고 돈을 끊고

이런저런 습관을 끊어보는 거니까

묵언도 단식도 없이 마침내

수행에 드는 사람

걷는 사람은 그리하여 길을 묻던 기억을 회복하는 사람

길을 찾는 핑계로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

모처럼 큰맘 먹고 찾아가던 경포호가

언제든 갈 수 있는 집 근처

호수공원이 되어버렸을 때를 무던히

가슴 아파 하는 사람

올림픽 덕분에 케이티엑스 덕분에

더 멀어지고 만 동해를 그리워하는 사람

강릉에서 올라온 벗과 통음을 하며

밤을 새우던 일도 옛일이 돼버리고 말았으니

올라오면 내려가기 바쁜

자꾸만 연락 두절이 되어가는

영 너머 먼 데를 잃고 더 쓸쓸해져버린 사람

나는 가야겠네 걷는 사람으로

먼 곳을 먼 곳으로 있게 하는 사람에게로

먼 곳이 있어 아득해진 사람에게로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흉터 필경사 - 손택수

 

이야기를 몸에 새기고 싶어서 흉터를 갖게 되었나 보다

살거죽을 노트로 내어주었나 보다

머리카락으로 가린 이마 위의 흉은 감나무 가지를 타고 놀다 떨어진 것이다

할아버지는 읍내 차부 옆 약방까지 달려갔다 오시고

강변 밭 매러 갔던 할머니는 눈에 독가시가 돋아났다

하이고 손씨네 귀한 첫손주를 잘 모시질 못했으니 내가 죽일년이라

그 상처 아물 때가지 숨도 제대로 크게 쉬질 못하고 지냈구나

흉터는 다문 뒤에도 말을 한다

어떤 흉터는 다이빙을 하던 냇물의 돌을 기억하고

돌에 부딪혀 까진 무르팍을 혀로 핥아주던 옆집 선자 누나를 잊지 못한다

돌이끼처럼 앉은 딱지를 상처가 나지 않게 뜯어먹던

물고기들의 입맞춤도 있다 각시붕어였지 아마

자신의 몸에 이야기를 파 넣는 필경사

어느 페이지엔 부끄러워서 혼자만 읽는 이야기도 있고

지워지고 지워져서 더는 읽을 수 없는 이야기도 있다

단벌 노트에 쓰는 비망록 나달나달해진 페이지에 지우개똥 같은 때가 밀린다

아니, 지우개밥인가 이 모든 이야기들이 나의 필생이라면 필경,

마지막 필경은 모든 기록을 불사르는 데 바쳐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