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별 뒤에 남아서 - 한관식

마루안 2020. 9. 11. 19:21

 

 

이별 뒤에 남아서 - 한관식 


찰과상 정도 가볍다고 생각한 나는 여전히 운동화 끈을 졸라매며 
새벽을 내딛습니다 바람이 순합니다 발끝에 덜 여문 아침이 묻어옵니다 
좀 더 속도를 낸다면 아침까지 내달릴 것도 같은데 
새벽 산책로는 生을 사고파는 
기대치의 가계처럼 늘 두근거리게 합니다 

내 이전의 아우성 
그것은 내 이전의 외침과도 같은 것. 어느 순간 욕망과 상관없는 
일탈이 나를 첨예(尖銳)한 모습으로 만들어 종탑의 뾰족 지붕으로 살았습니다 
이십대의 얘기였지요 고쳐 앉으면 가능성 없는 피안(彼岸)이기도 했습니다 
운동화 끈이 이만큼, 풀릴 때도 되었는데 오지게 매듭처리가 된 듯합니다 
지치면 등 뒤의 그리움이 말려 올라 무게가 되고 
떠난 당신으로 하여 보푸라기도 
한 움큼 묻어 날 것 같아 내 이웃도 놓친 한 발 한 발을 포장하여 
산책로를 달립니다 

나선형의 풀잎들도 하늘과 내통하면 여치며 메뚜기며 청개구리가 친구가 되고 
구름 한 조각 똑 떨어지면 잠자리 유충으로 생과 결탁하고 
아직 빛으로 남았다면 
돌아올 적 산책로를 선회한 여름의 처음으로 
당신을 만나기 전 그해 여름으로 
간절한 내가 보입니다 


*시집/ 밖은 솔깃한 오후더라/ 보민출판사

 

 

 

 

 

 

지금도 불편하다 - 한관식 


마당 가운데 온전히 이 몸을 내어놓을 수 있다면 
맨드라미의 핏빛 심장으로 서고 싶다 
뒤축이 닳은 신발로 짐작하겠지만 
떠돈 인생이 거기에서 거기더라 
서로의 손을 잡고 있어도 
이쪽에 닿으면 엉켜 있고 
저쪽에 닿으면 부러지고 말, 
가거라, 난 어차피 바람조차 지나친 등걸로 살터 
산다는 건 온전히 내놓지 못하는 육신을 
벗고 입장하는 것이다 
이 세상, 가장 어두운 곳에 등불이 켜진다면 
먼 곳을 달리던 기차가 
마당으로 들어와 고단한 갑옷을 던질지도 몰라 
나는 쪼그리고 앉아 불편한 왼손을 
햇살 좋은 자리에서 사무치게 둔다 
타닥타닥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소리로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