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비가 오면 추억에 잠기는 건가요 - 김대호

마루안 2020. 9. 12. 19:33

 

 

비가 오면 추억에 잠기는 건가요 - 김대호


손톱 발톱이 돋아나 있는 자리가 내 몸에서 가장 먼 곳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보다 먼 것이 있는 듯했다
내 몸의 일부인데
내 것인데 내가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것
수술을 하고 투시사진을 찍어도 현상되지 않는 것
그러나 내 몸의 일부로 있는 것이 분명한 것
수시로 내 몸의 수축과 이완에 관여하는 것
기분에 관여하는 것
아무리 긁어도 시원해지지 않는 것
나에 대한 나쁜 소문이 귀에 들어오고
고립되고 낮아지고
내 신체의 일환이지만 나와 따로 노는 것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누군가의 눈빛에 퍼뜨리는 것
그게 무엇일까

어디서부터 그것과 내가 꼬인 것일까
평생을 좌우하게 했던 어떤 선택 그 순간부터
그것과 나는 꼬이게 된 것일까
죽을 때까지 가슴에 묻고 가야 할 일이 있었던 그 날부터였을까
걸을 때마다 운명이라는 족적이 찍혔다
비명도 모자라 피가 나도록 긁었던 손톱에서
운명은 또 조금씩 돋아났다
모든 형식과 내용은 결국 한곳에 고인다는 일기를 쓴 후
내 몸에서 가장 먼 것은 내 몸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만질 수 없고 보이지도 않지만 항상 파르르 떨고 있는 것
내가 잠잘 때도 내 곁에 있는
파르르 떨면서 편집을 시작하는


*시집/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 걷는사람

 

 

 

 

 

 

원적 - 김대호


고향집은 폐허가 되어 누구도 거주하지 않지만
주소는 아직 말소되지 않았다
그 주소로 당선 소식을 기다리고 당신의 답신을 기다렸다
여러 번 주소를 옮겨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 원적은 바람과 먼지의 소굴이 되었다
그 주소로 편지를 전해 주고 냉수 한 사발 얻어먹고 냉큼 일어서던 배달부는 얼마나 늙었을까나
그땐 배달부, 엿장수, 비렁뱅이 모두가 사람이었고
누구를 해치지 않았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다 보면 둘 사이에 찌꺼기가 낀다
정기검사를 통해 청소하지 않으면 녹이 슬거나 금이 간다
사람이 괴물이 되기도 한다
대화의 엔진이 멈추고
둘은 먼 길을 각자 반대쪽으로 가며 으르렁거린다

그런 때
나는 바람과 먼지의 거주지가 된 내 원적과
그 주소지로 배달돼 오던 손편지들을 생각한다
사람 옆에 사람이 있었다
가난 했지만 누구도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