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거울이 있는 병실 풍경 - 조현정

마루안 2020. 9. 3. 19:01

 

 

거울이 있는 병실 풍경 - 조현정

 

 

소리 없는 비명의 날들은

언제나 삶을 잘 여미기도 전에 찾아온다

 

아무 상관없는 것이 있을까

나와 얼굴이 같은 민머리 여자

동굴처럼 성가시게 입을 벌리고

그르릉그르릉 울고 있다

목에 박힌 관을 따라 들어간 호스

서리꽃 핀 나뭇가지 사이를 돌아다니며

몸속을 긁고 있다

 

사랑에 발등 찍혀 절절매었느냐

막차가 끊어진 정거장 서성대다

매운바람에 눈물 떨구던 날 있었느냐

날이 밝으면 어린 자식들은 누군가의 손을 잡고

노란 승합차를 기다려야 하는

한낱 하품 같은 것들이 서러운 눈알을 굴리며

지나간다

 

저 멀리 눈발을 헤치고

사람의 눈동자를 가진 독수리 한 마리

거울 속 깊이 고랑을 내어

피 묻은 깃털의 뿌리를 심었다

머지않아 펄럭이는 날개 틔우리라

 

그녀의 넘어갈 듯 걸쳐진 눈동자에

아스라이 물들어 있는

나,

당신

 

 

*시집/ 별다방 미쓰리/ 북인

 

 

 

 

 

 

폐선(廢船) - 조현정

 

 

내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아

아무 바람이라도 만나면 포근히 실어주었더라

바람은 잠시 쉬다가 이마에 미열만 남기고

싸늘히 돌아갔더라

나는 안개 속을 더듬으며 강물 위를

슬픈 사람처럼 걸었더라

 

늦 코스모스 져가는 강 언저리에 서면

고향 이야기 들려주던 그 자의 노랫소리 선연한데

그 노래 아름답다 말해주지 못했건만

초저녁 노을빛 아련하기만 한 나의 사랑은

저기 떠나는 자의 모습으로 서 있더라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 자의 모습으로 서 있더라

 

반은 물 속에 반은 물 밖에 걸친 채

온몸에 돋은 수초를 쓰다듬으며

시간아 가거라 어서 가거라

나를 늙게 해다오 빨리 늙게 해다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수만 년을 살았더라

이제 그대의 시절 속에 함께할 수 없으니

더는 떠나보낼 수 없어 행복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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