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이 있는 병실 풍경 - 조현정
소리 없는 비명의 날들은
언제나 삶을 잘 여미기도 전에 찾아온다
아무 상관없는 것이 있을까
나와 얼굴이 같은 민머리 여자
동굴처럼 성가시게 입을 벌리고
그르릉그르릉 울고 있다
목에 박힌 관을 따라 들어간 호스
서리꽃 핀 나뭇가지 사이를 돌아다니며
몸속을 긁고 있다
사랑에 발등 찍혀 절절매었느냐
막차가 끊어진 정거장 서성대다
매운바람에 눈물 떨구던 날 있었느냐
날이 밝으면 어린 자식들은 누군가의 손을 잡고
노란 승합차를 기다려야 하는
한낱 하품 같은 것들이 서러운 눈알을 굴리며
지나간다
저 멀리 눈발을 헤치고
사람의 눈동자를 가진 독수리 한 마리
거울 속 깊이 고랑을 내어
피 묻은 깃털의 뿌리를 심었다
머지않아 펄럭이는 날개 틔우리라
그녀의 넘어갈 듯 걸쳐진 눈동자에
아스라이 물들어 있는
나,
당신
*시집/ 별다방 미쓰리/ 북인
폐선(廢船) - 조현정
내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아
아무 바람이라도 만나면 포근히 실어주었더라
바람은 잠시 쉬다가 이마에 미열만 남기고
싸늘히 돌아갔더라
나는 안개 속을 더듬으며 강물 위를
슬픈 사람처럼 걸었더라
늦 코스모스 져가는 강 언저리에 서면
고향 이야기 들려주던 그 자의 노랫소리 선연한데
그 노래 아름답다 말해주지 못했건만
초저녁 노을빛 아련하기만 한 나의 사랑은
저기 떠나는 자의 모습으로 서 있더라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 자의 모습으로 서 있더라
반은 물 속에 반은 물 밖에 걸친 채
온몸에 돋은 수초를 쓰다듬으며
시간아 가거라 어서 가거라
나를 늙게 해다오 빨리 늙게 해다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수만 년을 살았더라
이제 그대의 시절 속에 함께할 수 없으니
더는 떠나보낼 수 없어 행복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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