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쟁이의 하루 - 백성민
은밀함으로 기어올랐다.
행여 들킬까
바람의 기척에도,
달빛에게도 숨을 죽였다.
왜라고 묻지 마라.
감각의 촉수는 삶의 자리를 탓하지 않았고
그저
한 뼘만 더 오를 수 있다면
무엇인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바람이 몰아친다고
서리와 눈보라 속에서도 놓을 수 없는 것
때론 우직한 욕심이고
미련한 정직함이라고 손가락질할 때도
품어 안고 삭여야 할 모든 것이
감사함이었다.
사철 붉은 잎이 진다.
새벽은 먼데
오늘도 비틀거렸던 하루가
쓰러진다.
*시집/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인 것처럼/ 문학의전당
황혼 - 백성민
해 저물녘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걷다 시들어가는 장미 한 송이를 본다.
가슴을 찔러오던 가시의 날카로움은 이미 시들었고
향기를 뽐내던 유혹도 사라진 지 오래
지워져 가는 시간 속에는 서럽기조차 한 푸른 하늘이 걸려 있어
가슴을 열어 녹슨 거울 한쪽을 꺼내 본다.
날마다 닦아내도 녹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고
유물함 깊은 곳에서 얼룩으로 머물 뿐,
허공에 찍어놓은 무수한 발자국은 긴 사다리를 놓아
흔적을 찾아보아도 끝내 뿌리친 열차가 남겨놓은 바람 소리로 남는다.
열차가 어느 곳에 멈추든 그것은 이미 또 다른 생의 시발점
떠나는 모든 것이 새로움을 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새벽 강둑을 걸어보면 안다.
소리마저 감춘 저 한때의 수런거림과
모든 것을 함몰시키고야 말 는개의 속살거림은 거쳐 가야만 하는 하나의 문일 뿐,
떠나야 한다. 조금씩 지워지는 가볍지 않았던 흔적은 바람 속에 남겨두고
어제의 미련과 희미해지는 외등의 그림자를 남겨둔 채
끝내 멈출 수 없는 한 번의 끝을 향하여
# 백성민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1980년 <청담문학>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이등변 삼각변의 삶>, <죄를 짓는 것은 외로움입니다>, <워킹 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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