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쓸데없이 헤프거나 막된 - 박수서

마루안 2020. 9. 1. 19:17

 

 

쓸데없이 헤프거나 막된 - 박수서


*
사랑은 밀가루반죽처럼 치댄다고 수제비나 칼국수가 될 수 없다 뚝뚝 떼어 뜨끈한 국물에 올려도 심장을 끓게 하지는 못할 일, 국뚜껑이 벌컥거린다고 다 진국은 아니야, 간이 덜 배인 그저 덜 우러난 육수의 뚝배기 귀를 만지작거리는

*
사내와 사내가 마주보고 있다 사내가 국을 건네고 사내가 술잔을 내놓는다 사내는 뭉크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고, 사내는 바그다드카페를 가고 있다 사내는 뽕짝을 불렀고 사내는 만화영화 주제가를 틀었다 사내가 있었으나 사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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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 맛을 넓고 깊게 느끼다 보면, 이것저것 라면 수프를 총집합한 풍미가 혀에 맺힌다

*
언제부터인가 혼자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 일이 불편하지 않아졌다 집 나간 텃새 백 마리를 헤아리며 꼭꼭 씹어 먹으면, 새털처럼 가볍게 주의의 눈총도 함께 날려보내리라

*
몇 날 며칠 멍하고 생각이 없다 생각이 생각하려 하지 않지만, 생각이 생각을 불러온다 바보처럼 끌려온 생각 때문에 또 생각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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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 풀처럼 조개나물처럼 사는 거야
쓸쓸한 영혼과 말동무나 하면서 눈에 띄지 않게 보랏빛 향기나 맡으며 솜털 속에서 누에처럼 사는 거야


*시집/ 갱년기 영애씨/ 북인

 

 

 



뜨거운 것 - 박수서


다행이야
뜨거움은 결국 사그라지든가 식어버리든가
끝내, 사라지든가

오래된 기억이 추억을 소떼처럼 몰아내고 있다
나는 추억의 단서를 발권하려 기억보다 길게 주저앉아 있다
목장의 잔디를 긁고 파기를 여러 번,
방목된 기억이 추억을 내몰기라도 할까 싶어
불안한 추억이 능선을 껴안고 노을과 함께 눈시울 붉어지고
해는 일찌감치 등 돌린다

뜨거운 것,
열광에 짓눌려 푸석푸석 말라버린 기억이
앞서서 식어가며 줄행랑치는 추억의 등까지 겨우 쫓아
둥구나무처럼 껴안고 기억도 추억도 아닌
그저, 식어버린 한때가 되었다




# 박수서 시인은 1974년 전북 김제 출생으로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박쥐>, <공포백작>, <슬픔에도 주량이 있다면>, <해물짬뽕 집>, <갱년기 영애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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