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눈에 띈 슬픔 - 정병근

마루안 2020. 8. 31. 21:48

 

 

눈에 띈 슬픔 - 정병근


베란다에 '흰꽃나도사프란'이 시들었다
마른 꽃을 단 채 머리를 풀었다
정수리 가마가 다 드러나도록
이러하니 그만 창을 닫아줘요
간곡한 외면, 모든 것은 나 때문이다
은유는 유구하고 옛날을 떠올리는 습관
그러니까 우리는 헤어진 적이 있구나
순간의 예지로 사진을 찍고 너를 기린다
세상은 아무 곳과 아무 때와 아무 것이었는데
나로 하여 네가 생겨나고 헤어졌다고 들었다
네가 나의 한평생이 되는
그런 필연의 내막 속에
나는 자꾸 미끄러지고 어긋난다
아주 어긋나서 너를 오래 잃고
뒤늦게 안 보여서 운다
옛날에 저질러진 사람아,
내 눈이 가는 곳에 있지 마라
예쁘고 슬픈 상징이 너를 덮기 전에
눈에 띄는 것은 좋고도 슬픈 일이다
공중에 터지는 불꽃처럼
담장 위에 피어버린 꽃처럼


*시집. 눈과 도끼/ 천년의시작

 

 

 

 

 

 

우화(羽化) - 정병근


헤어져야 노래는 아름답다
간 끝에 돌아오는 길이 굽고 멀다
꽃이 예쁘면 마음이 서럽다
갈 수 없고, 안 보이는 얼굴이 그립다
아무것도 안 하는 햇빛을
나비는 가로질러 간다
구름을 구경하기 좋은 살구나무 밑
평상에 도착하는 매미 소리
누더기에 삐져나온 눈부신 흰 발
죽어서 죽지 않는 말아,
날마다 꺼내 보는 거울의 안색이
불 맞은 대추나무처럼 우멍하다
땅을 파든 바퀴를 굴리든
쉼 없는 것, 밤낮으로
쓸모없는 쓸모의 아귀를 두들겨 맞추는 일
반복보다 더한 가르침은 없다
그것은 부질없고, 손에 굳은살이 박이고
묻은 때가 반질반질 빛나는 것
목구멍에서 실이 나올 때까지
먹고 먹는 일, 바늘을 삼키는 사람을 보았다
실을 뽑아 방을 짓는다
머리맡에 예언을 걸어놓고 방문을 닫는다
눈보라 같은 잠의 등을 찢고
먼 곳이 돋는다
날개는 피의 투명한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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