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미신을 믿고 여름을 조심하고 - 김대호

마루안 2020. 8. 30. 18:31

 

 

미신을 믿고 여름을 조심하고 - 김대호


각시붓꽃이 거느린 보라의 세계는
겨우 자신의 체중을 견디는 정도였다
아침에
비 맞은 붓꽃과 반짝이는 보라와 뒷산에서 내려온 짐승을 보았다
내 하루는 그것들의 생태에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다
지중해로 여행을 떠났던 피곤의 배경이
아침에 본 보라의 세계라면
나는 더욱 사소해져야 될 일
사물의 풍경에 후회를 섞은 건 내 착각이었지만
내가 매일 여러 개의 퍼즐로 쪼개졌다가
잠들기 전
각각 다른 무늬를 분류하고 모으고
성질이 비슷한 장르끼리 묶는 수고를 해야 하는지 몰랐다
이것만으로 낯선 감정이 도착하지는 않으리
미신을 믿고
여름을 조심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모은다
너무 멀어서 은밀하지 못한 것들
너무 가까워서 부풀어 보였던 것들
아플 때마다
어둔 방을 방문하던 불편한 체온이여
한 계절을 겨우 견디는 보라와
피곤의 감정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본뜨는 어둠
낮과 밤이 겹치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시집/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 걷는사람

 

 




소리라는 음식 - 김대호


비 그친 감나무에서 새가 운다
내 어섯한 청각은
엇비슷한 새소리의 음절을 알 수 없으니
며칠 전 그 가지에서 꼬리를 까불던 그 새가 오늘의 이 새인지 분간을 못 한다
그냥 본다
새도 나를 그냥 볼 것이다

비는 벌써 그쳤지만
잎사귀에 있던 작은 빗물이 투둑 떨어졌다
빗물의 최후 눈물인가
빗물의 언어 같기도 했다
비와 새와 바람 따위가 내 귀를 지나가면서 전하는 전언
그것의 발성법과 문법을 해독할 수 있으면 좋겠다

어느 저녁에는
싱크대 물소리를 듣다가 오열한 적이 있다
또 어느 가을에는 연애편지를 나무 밑에 묻으려고 산에 갔다가
발에 밟히는 낙엽 소리와 오래 얘기하다가 내려온 기억도 있다

누가 나를 나쁘게 하지 않아도
나는 알아서 나빠졌다
나쁜 것이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변성기가 지나고 얼마 있으면 노안이 오고
노안으로부터 틀니가 멀지 않듯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나빠지는 것은 내 인생의 목록
적당한 순번에
이미 기록되어 있었기에

변성기에서 이명은 멀지 않았다
울음으로 시작해 비명으로 끝나는 여정도 멀지 않다
감나무의 새소리
바람의 기침 소리
내 이명에는 따로 약이 없다고 한다
귀에서 소리가 체하면
일단 소리를 과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경창파 - 박미경  (0) 2020.08.31
눈에 띈 슬픔 - 정병근  (0) 2020.08.31
손이 없다 - 이소연  (0) 2020.08.30
푸른 잉어의 나날 - 서영택  (0) 2020.08.30
개 같은 - 이돈형  (0) 2020.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