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테두리로 본다는 것 - 박남희

마루안 2020. 8. 29. 19:26

 

 

테두리로 본다는 것 - 박남희

 

 

그는 알이 없는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본다

 

멋을 위한 것일까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희뿌연 달무리가 떠오른다

달에게 달무리는 왜 필요할까를 생각해보면

안경 테두리의 효용을 이해할 수 있다

 

테두리로 본다는 것

 

눈과 세상 사이가 너무 황홀해

그 사이에 유리는 빼고 그냥 테두리로

세상을 보고 눈을 본다는 것

 

그냥 맨눈으로 보는 것이 너무 죄송해서

테두리로 보는 것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다

 

눈부신 세상을 바라볼 때

까만 테두리가 있어 세상이 또렷이 보이는

그런 당위성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테두리로 본다는 것

 

그것에는 왜 유리가 없느냐고 나무랄 수 없는

유한의 광활한 바깥이 있어

달보다 달무리가 아름다운 것이라고

 

토성이 천왕성을 보듯

그는 알이 없는 안경을 끼고 세상의 바깥을 본다

 

 

*시집/ 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 걷는사람

 

 

 

 

 

 

추상에서 구상에 이르는 길 - 박남희

 

 

구름이 추상이라면

창밖의 저 비는 구상에 이르는 몸짓

빗물이 닿아 싹이 트고 꽃이 피는

오래된 습관의 힘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저 구상의 꿈틀거림

 

어린아이가 엄마 배 속에서 나와

터뜨리는 울음이

추상과 구상을 가르는 경계의 기호라면

어린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노년에 이르는 길은

오히려 구상에서  추상에 이르는 길

 

아마도 신은 멀리서 미술관 같은 세상을 바라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추상과 구상 사이의

운필법과 바람의 꿈틀거림을 말없이 읽고

구상에서 차츰 추상으로 향하는 지구의 모습을

흘끗 쳐다보았으리

 

늙는다는 것은

구상에서 추상에 이르는 것

그것을 거스르는 일은

거울 속에 숨어 있던 세상을 들추어내는 것뿐,

 

그동안 지구는 알고 있었을까

지구의 거울인 달이 저토록 환한 것은

지구가 잃어버린

추상에서 구상에 이르는 길을

지구에게 일깨워주기 위한

거울의 눈물겨운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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