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불시착 - 우남정

마루안 2020. 8. 28. 22:02

 

 

불시착 - 우남정


빈방에 하나의 침대와 비어 있는 의자가
비행운을 그린다

살비듬 핀 절벽에 검버섯이 말라붙어 있다
발끝에서 푸르스름한 바람이 올라온다
심박기의 그래프가 잦아드는 숨을 그리고 있다
검지를 물고 있는 감지기가 급히 우주로 심박을 타전한다
서둘러 온 창밖의 달빛이
교신할 듯 벌어진 입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호스피스 병동의
차고 푸른 적막 속으로
구조를 기다리는 흰그림자들이 일렁인다

다급하게 방문이 열리고
몇 억 광년 전 어느 별빛이 막 당도했는지
파랑 하나가 직선을 끌고 간다
계기판은 제로선을 그으며 찌- 무한이 돌아오고 있다

어머니!
마지막까지 떠나지 못하던 귀가 알아듣고
감은 눈에서
가만히 투명한 캡슐 하나가 흘러나온다


*시집/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문학의전당

 

 

 

 

 

 

풀물이 드는 오후 - 우남정


발동기가 괴성을 지르고 있다
공원 구석구석 풀숲을 헤집고 있는
노란 작업복 사내의 등에서 파란 점액질이 출렁거린다

이름을 물어보고 근황을 챙길 겨를도 없다
씨앗을 맺은 꽃대가 쓰러지고
넌출 밑동이 잘려 나가고
풀 보라 비릿하게, 허공에
풀물이 든다

모자 깊이 눌러쓰고 얼굴을 가린 채
종종 멈춰 서서 범벅이 된 풀 조각 털어내며
심호흡을 하고 있는 사내에게서 절삭유 냄새가 진동한다

뜨거운 단말마 속으로 기울어지는 해
죽음이 향긋하지 않느냐고
차라리 달짝지근하지 않느냐고
벌겋게 핏물 벤 서녘을 꿀꺽 삼킨다

초록은 잠시 잘려 나간 발등을 바라본다

처서에 들러붙은
그것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풀.풀.풀

담배를 빼어 문 사내의 손끝이 떨리고 있다

 

 

 

# 우남정 시인은 1953년 충남 서천 출생으로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제16회 김포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가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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