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 허연 시집

마루안 2020. 8. 20. 19:49

 

 

 

허연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을 냈다. 어쩌다 그의 시에 중독이 되어 고대하며 기다렸던 시집이기도 하다. 이 시인을 알게 된 것은 세계사 시집을 만나면서다. 김형술, 이연주, 진이정, 유하, 그 사이에 허연이 있었다. 지독하게 외로웠던 시기에 그의 시를 만났다. 

 

<불온한 검은 피>, 제목부터 딱 마음에 들어오는 시집이었다. 내가 시를 읽었을 뿐인데 그의 시가 말을 걸었다. 눈물 나게 고마웠다. 위로 받고 싶을 때 다독여 주었고, 울고 싶을 때는 뺨을 때려줬다. 밝음보다 어둠, 기쁨보다 슬픔을 말하는 그의 시가 마음에 들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일까. 한동안 시를 쓰지 않은 탓에 점점 잊혀졌다. 10년이 훨씬 지나 잊고 살 무렵 두 번째 시집을 들고 나타났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그가 먹고 살기 위해 시를 떠나 있었던 나쁜 소년이었음을 알았다. 시인은 죄와 어울리는 나이가 되어 내 마음을 훔쳤다.

 

시집을 표지가 닳도록 읽고 읽었다. 민음사 시집 표지는 다행히 두꺼웠다. 읽을수록 그의 시에 중독이 되었다. 쓴물도 나오고 짠물도 나왔다. 씹을수록 단맛이 나오다 허기가 졌다가 목이 마르기도 했다. 시집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게 한 몇 안 되는 시집 중 하나였다. 

 

두 번째 시집 이후 시인의 시집 내는 시기가 올림픽 주기처럼 일정해졌다. 이 시집도 4년 만에 나왔다. 정해 놓고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나 시인의 시 쓰기가 꾸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시를 읽으면 그가 천상 시인임을 절절히 느낀다.

 

그림도 화풍을 보면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있듯이 시인 이름 지워도 딱 읽으면 그 사람의 시인 줄 알 수 있는 시가 허연의 시다. 초기 시에서 그런 경향이 뚜렷했는데 이번 시집에는 자신의 개성을 다소 누그러뜨렸다. 나쁜 소년도 어깨에 힘을 뺄 때를 알게 되었을까.

 

나 또한 이 시집을 펼치면서 허겁지겁 읽지 않았다. 허기질수록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느리게 읽었다. 시인을 감지할 수 있는 방법은 온전히 그 시에 빠져보는 것인데 원판이 어디 가겠는가. 시인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희망보다 절망을 건져 올리고 있다. 

 

시 읽기와 별개로 참 뻣뻣하게 살던 시절이 있었다. 처세술에 미숙한 내 천성이 어디 가랴마는 미운 사람과 억지로 화해하기 위해 마음에 없는 알랑방귀 뀌지 않는다. 다만 저놈 원래 그런 놈이었지 하며 표나지 않게 방치하는 기술을 익혔다.

 

미운 놈 때문에 속앓이 하다 제풀에 나가 떨어지기도 했고 아득바득 기어코 걸고 넘어져야 직성이 풀리기도 했다. 그러고도 시를 읽고 인생을 논하고 허영심에 빠져 읽지도 않은 책을 자랑하기도 했다. 이제는 있는 그대로가 좋아요다. 

 

시집 후기에 엉똥한 소리를 했다. 이것도 좋은 시집을 내 것으로 만드는 한 방법이다. 시집 하나에 목숨 걸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시인의 영혼이 담긴 시집에 풍덩 빠져 보는 것도 좋겠다. 아껴 가면서 오래 읽고 싶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