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 - 김대호 시집

마루안 2020. 8. 22. 21:40

 

 

 

공교롭게 이번 시집 후기도 출판사 <걷는사람>에서 나온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나 여기서 좋은 시집이 연달아 나오는 걸 어쩌랴. 가능한 편식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이 시집도 내 마음을 딱 사로잡았다. 목차도 읽지 않고 그냥 몇 페이지 넘기다가 이 시인 나와 맞겠구나 촉이 온다.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 홀린 듯이 서너 편의 시를 읽고 시인의 약력을 살폈다. 경북 김천에서 출생하여 2012년 시산맥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는 짧은 약력 뒤로 호기심이 발동한다. 시 한 편 한 편이 예사롭지 않게 읽힌다.

 

모처럼 마음에 담을 만한 제대로 된 시인 하나 만난 기분이다. 시집을 읽고 작가를 논리적으로나 문학적으로 평가할 능력이 내겐 없다.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을 나열할 뿐이다. 이것이 아마추어 시 읽기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얼굴 보고 이름 짓는다고 했던가. 시집 제목은 시인과 편집자 나름 고민해서 지었다고 치고 넘어가자. 목차에서 범상치 않은 흐름이 감지 된다. 1부. '불온하지만 살아 있는 형태로'를 시작으로 4부. '인공감정'까지 시인의 작품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 가게 된다.

 

시집 전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나눔과 배치다. 시중의 많은 시집에서 왜 1부니 2부니 하면서 나누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았다. 그저 빈약한 시집 페이지 늘리는 용도밖에 없단 생각을 했다. 이 시집은 부를 나눈 소제목만 보고도 무얼 말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시의 제목들 또한 한 편의 영화 제목으로 손색이 없는 오래 기억하고 싶을 정도로 짙은 서정성을 담고 있다. 제목 한 줄이 바로 빼어난 시의 완성품처럼 보인다. 이런 제목을 지나치게 남용하면 시가 너무 달달해질 염려는 있다.

 

시집에는 <밤, 어둠, 슬픔, 당신, 불온> 등 시인의 정체성을 감지할 수 있는 몇 개의 어휘가 있다. 나는 먼저 드문드문 나오는 불온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집이 불온한,/ 당신은 슬픈 주소를 가졌다> -당신은 슬픈 주소를 가졌다. <불온한 날짜와 예측이 불확실한 날씨를 따라 어디론가 흘러갔다> -숙성 중인 생활. <건전한 의심이란 불안보다 넓은 평수의 고백을 경작한다/ 불온하지만 살아 있는 형태로> -의심 한 뚝배기 하실라예.

 

나는 왜 예전부터 불온이란 단어에 무장 해제되는 것일까. 어둠 또한 여러 곳에서 시집을 관통하고 있다. <어둠을 헤엄쳐서 또 다른 어둠으로 사라지는 속도들> -수용성. <어두워서 좋았던 연애를 생각한다/ 어두웠기에/ 당신의 장점은 천천히 발전했다> -난민이 된 어둠. <그것을 건드린 후 나는 어두운 쪽으로만 걸었다> - 주술.

 

<내가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본뜨는 어둠> -미신을 믿고 여름을 조심하고. <어둠이 빛나는 한낮을 지나/ 어둠의 원본이 드러나는 밤이 온다> -어둠의 원본. <낡은 의자 아래 숨었던 어둠의 일부/ 이제 분명해지지 않았는가> -어두운 울음. 이 외에도 어둠이 너무 많아 전부 다 옮기지는 않는다.

 

누구나 가슴에 상처 몇 개쯤은 담고 살겠지만 시인은 유독 슬픈 상처가 많은 듯하다. <당신을 완전히 이해하면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기에>, 설명보다 질문이 더 아프다. <당신이 나를 설명하고 내가 당신을 이해했을 때/ 우리는 헤어질 수 있었다>에서 오래 눈길이 머문다.

 

<형벌이라면/ 내가 살고 있고 이미 살았던 시간을 다시 그대로 한 번 더 살아야 한다는 것>, 윤회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시인도 나도 형벌을 온전히 받고 있지 않을까. 우연히 읽은 시집인데 좋은 시인 하나를 제대로 만났다. 당분간 이 시집으로 시에 허기질 일은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