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게 - 권혁소
무지 때문이 아니라
희망에서 비롯된다 모든 슬픔은
처음이라는 기대와
마지막이라는 애절함이
슬픔의 기원이었음을 알았을 때
너도 나도 다시는이라는 단서를 달아
각오를 한다, 이제 더는 희망 같은 거와
속삭이지 말자고
그럴 때 삶은 주저앉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슬픔의 이면에는 어떤 단단함도 있어서
신발을 꺾어 신고서라도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나아간다, 생애 첫 다른 흔적을 남기며
그대 차가운 손을 덥히던 어떤 온기 같은 것
슬픔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슬픔아
부디 오래오래 머물러다오, 슬픔 너는
희망의 다른 이름 아니더냐
*시집/ 우리가 너무 가엾다/ 삶창
우리가 너무 가엾다 - 권혁소
배롱나무를 좋아하는데,
감나무도 한두 그루 있다면 좋겠는데
주춧돌 세운 여기는 배롱나무도 감나무도
뿌리 내릴 수 없는 수목한계선
알면서도 나무 탓을 한다
현주(玄酒) 같은 사랑 한 번 하고 싶었는데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마음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가여운 존재였을까,
잘라버리고 싶은 나무였을까
더 이상 뿌리를 뻗지 않는 나무를 뽑아내며
이제야 묻는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던 것이냐고
등 돌린 그대가 저만치 걸어간다
그대가 가서 숲이 된다면 좋겠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말고 동짓달 하늘에 핀
초승달이 된다면 좋겠다, 이것이
빌 수 있는 마지막 축복이라니
우리가 너무 가엾다
# 玄酒가 뭘까 했다. 제사 지낼 때 술 대신 쓰는 맑은 찬물을 말한단다. 여태 몰랐던 어휘다. 알고 나서 다시 읽으니 공감이 배가 된다. 인연도 운명도 어긋나는 건 인력으로 되지 않는다. 살다 보면 알게 된다는 말도 있던데 그것마저 늘 빗나가기에 더욱 살고 싶어지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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