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후유증 - 전영관

마루안 2020. 8. 12. 22:41

 

 

후유증 - 전영관


불행은 물고기 눈 같은 것
덮어지지도 않고
잠들지도 못한다

제 당혹에 맞는 피난처가 없는지
바람은 몸부림치며 골목을 휘젓는다

유연한 척하는 고양이 걸음에서
적응을 거듭한 애틋함을 공감한다
마비로 몸이 기울어질 때마다 한탄만 했다
고양이 눈은 현실의 두려움이 응집되는 초점
살아내는 모든 것들의 불안을 암시한다
아침마다 체육관에서 애를 써도
잠만 자는 고양이만큼 유연해지지 않아서
졸렬하게도 그 몸짓을 부러워했다
걸을 때마다 걸음의 리듬을 배반하는
왼발의 후유증 때문에 재활 의지를 의심받고
의료용 긍정을 한 다발씩 처방받았다

야린 이파리들이
징그러울 정도로 건강해진 동네 공원

제 존재를 증명하려면
더욱 차가워져야 하는 눈사람이 된 양
피가 돌지 않아 차가운
왼발을 뭉치듯 주무른다
왼쪽만 닳은 뒤축을 보면
세상이 통째로 기울어진다

노을은 작고한 무명 시인의 습작 노트
시편마다 마지막이다
몸이 우중충할 때마다 낙담하며 고른
내일의 날씨를 동쪽에 걸어두었다


*시집/ 슬픔도 태도가 된다/ 문학동네


 

 

 

 

가까이 - 전영관


완치는 없다 한다

발음은 반듯해지고 걸음까지 정상이라 대답했다
파르티잔 전법으로 시도 때도 없이
마비 후유증에게 습격당하는 왼쪽 몸이
난감할 뿐이라고 웃었다 불안을 감췄다
말끔하게 병을 씻어낸다는 완치는 없고
근처까지는 도달한다는 뜻으로 근치(近治)라고
의사는 항우울제 같은 미소를 내민다
선생님 혹시, 애착을 아시느냐고 물을 뻔했다
도무지 닿지 못할 것만 같은 사람을 향해
무작정 출항하던 청춘의 새벽을 기억하느냐고
낭만을 비웃을 뻔했다
액자에 넣어두고 싶었던 밤을 후회한 적 있느냐며
그런 상처야말로 완치가 아니라 근치일 거라고 동의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근육이 마비로 남은 탓인지
92병동의 뇌손상 환자들 표정은 제각각이다
인지가 살아난 그들의 표정은
망가진 육신에 슬픔이 도착하면서 모두 비슷해진다
근치 판정까지 받은 나는 왜 그들과 흡사한 표정인지
도무지 도달하지 못할 것만 같은 완치는 어디인지
가만가만 왼손을 만져보는 것이다



 

*시인의 말

막다른 길에 몰리면 무기를 찾았다
주먹 따위로 가슴을 두드릴 수는 없었다

도움을 청해도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버린 채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누구도, 무엇도 없는 장르를 구축했다

그 번민의 파편들을 여기 남긴다

희망은 절망을 외면하는 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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