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정거장은 한 세계다 - 한관식

마루안 2020. 8. 17. 22:29

 

 

정거장은 한 세계다 - 한관식

 

 

풍경이 정물처럼 멈췄다

갈라진 안과 밖으로 염치없이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늘은 맑았고

구두는 반짝거리며 자유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무료한 산새의 울음이 희미하게 이정표에 대롱거렸다

그 푸르고 역동적인 바람은 포플러 잎새를 다녀갔다

나는 쓸쓸하였다

오랫동안 비워진 공간을 채우기 위해 생성과 소멸이

도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거친 열정으로 먼 바다를 꿈꾸던 청년은 어디가고

정거장에서 혼자 서성이는가 듣는가 그대여,

바람을 안은 풀꽃은 아스팔트길의 끝을 찾아 두런거리고

무너져 내린 흙벽을 통해 소통하는 자유의 숨결

가거라 아직 생애는 바닥을 보이지 않았다

실핏줄처럼 얽힌 인연을 안고 돌아올 고향과 함께

느릿한 희망에도 미소 지으며

저기 버스가 온다

 

 

*시집/ 비껴가는 역에서/ 도서출판 미루나무

 

 

 

 

 

 

다락방 - 한관식

 

 

넘어지고 깨어지며 살아오지 못한 나는 늘 뒤편에서 있는 두 마는 둥 이끼처럼 유년을 보냈다 그런 내게 최상의 은신처는 다락방이었다 표지가 너덜해진 책들과 곰팡이 냄새에 취해 뒹굴며 하루해를 훌쩍 념겼다

 

여섯 살 터울 형의 일기장은 베스트셀러였다 읽을수록 맛깔스럽고 정감이 갔다 그리고 문학이 찾아왔다 형의 일기장 모서리가 너덜해질 때쯤 나도 일기를 쓰고 있었다 날짜와 날씨와는 상관없이 사물과 생각과 대입과 반성으로 한 쪽을 채웠다 물론 건너 뛸 때가 더 많았지만 계기를 만든 건 형이다

 

여름이 최상이다 뒷집 수돗가가 휜히 보이는 곳에 조금만 마음을 먹으며 은닉이 자유로웠다 대낮에도 대문을 채운 뒷집 가족들은 수시로 등목을 즐겼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램프 속 거인을 부르듯 고추를 만지작거렸다 여름은 왜 이리도 더디 오는가

 

형도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았다 뒷집도 이사를 가서 빈집으로 남았다 시들해진 다락방에서 개미핥기처럼 책더미를 헤집고 다니며 무언가를 손에 쥐려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는 여전히 목마름으로 다가오는데 그 실체는 오리무중이다 어쩌면 그냥 살아가는 것이 그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오십 육년을 살아보니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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